이상헌 국제노동기구 고용정책국장 “산재 대응으로 기업 위축?… 한국적 우려” [차 한잔 나누며]

2025-08-24

“대통령 원맨쇼로 볼 수 있지만

기대해왔던 정치적 의지 보여줘

생산성·고용 개선 선순환 될 것”

“외국은 경제가 성장하면 산업재해가 확 줄어드는 경향을 보여요. 한국은 왜 안 그럴까 생각하면, 법 제도보다 정치적인 의지 부족 문제였다고 봐요.”

이상헌(사진) 국제노동기구(ILO) 고용정책국장은 이재명 대통령의 산재 근절 의지를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이 국장은 서울대와 영국 케임브리지대에서 경제학을 전공한 뒤 2000년부터 ILO에서 근무했고, 2018년 한국인 최초로 ILO 국장직에 올랐다. ILO의 한국인 국장은 지금까지도 그가 유일하다. 고용정책 전문가로 올해 5월 저서 ‘왜 좋은 일자리는 늘 부족한가’를 펴내기도 했다.

5일 3주 일정으로 여름 휴가차 한국을 찾은 그는 “정부가 이렇게 노동 정책에 힘을 실어준 건 국제통화기금(IMF) 경제 위기 이후 처음인 것 같다”고 18일 말했다. ILO에서 노동시간, 고용에 관한 포괄적인 연구와 정책개발을 하며 한국의 고용노동정책을 지켜봐 온 소회다. 최근 이 대통령이 산재 근절을 언급하고 직접 사안들을 챙기는 데 대해서는 “속된 말로 ‘대통령의 원맨쇼’라고 볼 수도 있겠지만, 그동안 우리 사회에 부족했던, 구체성과 현장성이 결합한 정치의 힘”이라는 견해를 밝혔다.

이 대통령은 올해를 ‘산재 사망사고 근절 원년’으로 삼겠다고 했다. 엄포에 더해 기업 관계자들과 만나 후속 대책을 직접 이끌어내기도 했다. 일각에서는 정책 지시를 넘어 SPC나 포스코이앤씨 등을 대통령이 일일이 거론하는 모습이 과도하다고 지적한다. 소위 윽박지르기로는 지속가능하지도 않거니와 구조적 변화가 뒷받침돼야 한다는 것이다. 이에 관해 이 국장은 “대통령 인기가 좋을 때 할 수 있는 일”이라면서도 “현장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위험을 느낄 때 자연스럽게 문제 제기하는 상황을 만드는 데 도움이 될 것”이라고 설명했다.

다만 이 국장도 대통령과 고용노동부 장관의 ‘말’은 한계가 있다고 짚었다. 임기 초반 반짝 집중을 모으다 휘발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슈에서 우선순위가 밀리는 순간에는 산재 근절 정책의 동력을 잃을 수도 있는 일이다.

관료적 관성도 경계할 일이다. 이 국장은 “공무원이기 때문에 가질 수 밖에 없는 걱정들이 있고, ‘신중한 접근’이라는 말로 속도를 늦추려 할 수 있다”고 내다밨다. 이어 “그런 관성 중심으로 일을 하려 할 때 이를 돌파하는 게 장관의 능력”이라며 “5년 이상 걸릴 일이기 때문에 고래 힘줄처럼 질기게 해야 한다”고 제언했다.

이 국장은 산재 대응 정책이 ‘기업 활동 위축’으로 이어질 것이란 일각의 우려에 대해 ‘매우 한국적’이라고 진단했다. 일례로 유럽연합(EU) 국가들은 산업안전 지침이 경제적 고려의 대상이 아니라고 못 박고 있다. 그는 “(산재 근절은) 비정상적으로 얻은 추가 이익을 정상화하는 과정”이라며 “산업안전 조치로 고용에 타격이 있다는 논리 구조는 차마 유럽에서는 입 밖으로 꺼낼 수 없는 말”이라고 했다.

기업 활동에 단기적인 충격은 예상되지만, 산업안전 위험이 줄면 생산성도 개선되고 고용까지 선순환이 이뤄질 것이라는 게 그의 믿음이다. 이 국장은 “고령화로 중장년 일자리도 더 많이 요구돼, 안전한 일자리를 만드는 건 곧 고용 문제이기도 하다”고 강조했다.

고용정책 전문가인 그가 심각하게 보고 있는 사안 중 하나는 ‘쉬었음’ 청년 인구다.

통계청에 따르면 지난달 일도 구직 활동도 하지 않는 20대 인구는 42만1000명으로 7월 기준 역대 최대였다. 이 국장은 결국 일자리의 질 문제라고 분석했다. 그는 “일자리의 질을 올리지 않으면 청년들이 노동시장으로 진입하거나 돌아올 가능성이 크지 않다”며 “이주노동자 일자리를 포함해 일자리의 양이 아닌 질에 집중해야 한다. 이제는 ‘정책의 시간’”이라고 주장했다.

이주노동 문제 역시 한국 사회가 마주한 큰 숙제로 꼽힌다. 생산가능인구가 빠르게 감소하는 상황에서 이주노동자들과 공존하는 게 더이상 선택의 문제는 아니라는 설명이다. 그는 “매해 최소 20만명씩 이주노동자 인구가 늘어야 한다는 분석이 있을만큼 한국은 경제적 이유로 이들이 필요한 상황”이라고 했다. 5월 발간한 저서 ‘왜 좋은 일자리는 늘 부족한가’서도 강조했듯, 이들을 불청객 취급해선 안되는 이유이기도 하다.

이 국장은 지난해 9월 고용부와 서울시가 시행한 필리핀 가사관리사 시범사업, 최근 전남 나주에서 일어난 지게차 결박 사건 등을 언급하며 “한국 사회가 이주노동자 문제에 얼마나 준비가 안 됐는지를 보여주는 상징적 해프닝”이라고 정의했다. 필리핀 가사관리사는 정책적 준비가 부족했던 ‘무리수’였다는 분석이다. 지게차 사건에 대해서는 “대통령이 지적해준 건 좋지만, 이때까지 이런 일은 너무나 많았고 우연히 드러난 것일 뿐”이라며 “이주노동자 처우와 관련한 뿌리깊은 관행을 없애기 위해 더 많은 공론화가 필요하다”고 했다.

이주노동자의 일자리 질을 끌리올리는 건 결국 청년고용정책과도 연결되는 문제다. 그는 “소위 ‘싼 값에 쓰겠다’는 취지로 일자리 질을 극단적으로 낮추면 청년들이 그나마 갈 만한 최저임금 이상의 일자리 질도 함께 낮아진다”고 비판했다.

이 국장은 정부가 아무리 의욕적이어도 모든 정책을 다 펼 수는 없다고 했다. 그런면에서 ‘주 4.5일제’는 우선순위를 조정할 필요가 있다는 입장이다. 현재로서 4.5일제를 도입하면 노동시간 손실분을 보전하는 성격으로 기업에 보조금을 줄 수밖에 없다. 적지 않은 자원을 투입해야 하는 일인데, 그럴만큼 시급한 문제냐에 관해 이 국장은 회의적이다. 그는 “장기적으로 추구해야 할 방향은 맞지만, 지금은 저임금 장시간 노동자에 대한 구조개선이 우선”이라고 덧붙였다.

동시에 노동시간 관련 정책에서 초단시간 일하는 노동자가 급증하는 문제에 더 집중해야 한다고 짚었다. 그는 “여성을 중심으로 초단시간 노동자가 너무 많이 늘었는데 성별 격차도 커질 수 있는 문제”라며 “더 일할 여력이 있는 노동자들이 직면하는 제약을 풀어서 이들의 노동시간을 늘리는 것이 더 우선순위에 놓인 문제”라고 했다.

이지민 기자, 사진=최상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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