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10월 일제강점기 해외에서 순국한 뒤 현지에 묻힌 독립유공자 7명의 위패가 고국으로 돌아와 국립서울현충원에 봉안됐다. 이들 중에는 노무현정부 시절인 2006년 건국포장이 추서된 최성학(1900∼1938) 선생이 포함됐다. 제정 러시아 시절 블라디보스토크 한인 학생회 회장으로 활동한 최 선생은 1920년부터 시베리아 연해주 일대에서 한인들로 구성된 항일 빨치산 부대를 이끌었고 대한의용군 참모부장을 지내기도 했다. 하지만 공산주의 소련 정권에 의해 ‘반(反)혁명 인사’라는 누명을 쓰고 억울하게 생을 마감했다. 소련이 붕괴한 이후 1995년에야 러시아 정부는 최 선생을 복권했다. 그의 부친은 유명한 독립운동가 최재형(1860∼1920) 선생이다.

최재형 선생은 일제의 침략으로 국권 수호가 위태롭던 구한말 연해주로 이주했다. 그동안 사업으로 번 돈을 조국 독립과 시베리아 이주 동포들을 위해 아낌없이 썼다. 1909년 안중근 의사의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 처단을 은밀히 지원했고, 안 의사가 순국한 뒤에는 남은 유족을 보살폈다. 최 선생이 오늘날 ‘연해주 독립운동의 대부’로 불리는 이유다. 대한민국 정부는 이 같은 공을 기려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한 바 있다.
1920년 4월 당시 63세이던 최재형 선생은 블라디보스토크 북쪽 우스리스크에서 일본군에 붙잡혀 순국했다. 일제는 고령의 독립운동가에게 총살형 집행이라는 만행을 저질렀다. 그 때문에 최 선생이 생을 마감한 곳은 우스리스크 일대로 추정만 될 뿐 정확한 위치를 모른다. 최 선생의 유해 또한 아직 찾지 못한 상태다. 그래서 오랫동안 서울현충원에 최 선생의 묘는 존재하지 않았다. 국가보훈부는 2023년 8월 최 선생의 부인 최 엘레나 페트로브나 씨(1952년 키르기스스탄에서 별세)의 유해를 국내로 운구해 현충원에 안장하며 최 선생의 위패를 합장했다. 사후 103년 만에 비로소 고국에서 부인과 영면에 든 셈이다. 묘소 위로는 블라디보스토크 주재 한국 총영사관이 우스리스크에서 채취한 약 3㎏의 흙이 뿌려졌다.

지난 7일 서울 용산 전쟁기념관에서 ‘8월의 호국 인물’로 선정된 최재형 선생을 위한 현양 행사가 열렸다. 기념관 운영 주체인 전쟁기념사업회 백승주 회장은 “조국의 독립을 위해 모든 것을 바친 선생의 ‘노블리스 오블리주’와 고귀한 호국 정신은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 모두에게 귀감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이에 최 선생의 5대손 최 일리야 씨는 “후손으로서 큰 자부심을 느끼며 오늘 행사가 할아버지의 정신을 널리 알려지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고 화답했다. 우리 국민 모두가 깊이 새겨들어야 할 말이 아닐 수 없다.
김태훈 논설위원 af103@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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