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 청년이 사망했다. 과도한 노동의 결과다. 그의 부고를 접하자마자 슬픔과 안타까움이 밀려왔다. “노동이 자유케 하리라(Arbeit macht frei).” 독일 언어학자 로렌츠 디펜바흐가 1873년 출간한 소설의 제목이다. 이 소설은 산업화 초기 빈곤과 불안이 가득한 독일 사회에 대한 해법으로 노동윤리를 제시한다. 주인공 프리드리히는 노동의 가치를 천시하지만, 결과적으로 노동의 아름다움을 깨닫는다.
소설의 제목은 1920년대 오스트리아와 독일 전역에서 윤리성을 회복하는 구호로 사용되었다. 사람들은 진실된 노동이야말로 진정한 자유에 도달할 수 있게 해준다고 믿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이 구호를 세계적으로 유명해지도록 만든 집단은 2차 세계대전 때의 나치였다. 1차 세계대전에 패하고, 전쟁배상금과 하이퍼인플레이션으로 경제가 붕괴한 뒤 집권한 나치당은 불안의 원인을 유대인과 공산주의자에게 돌리고 적으로 규정된 이들을 잡아들여 수용소에서 강제노역을 시켰다. 노동이 자유를 준다고 약속하는 이 표어는 1933년 오라니엔부르크 임시수용소 정문에 붙었고, 이후 표준화되어 나치가 운영하는 수용소마다 박제되었다.
사실 이 문구는 경제적 착취 시스템을 정당화하는 달콤한 협박이었다. 노동의 가치를 폄하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노동으로 얻어지는 대가가 어디를 향하는가에 대해 생각해보자는 것이다.
자본주의 아래에서는 ‘이렇게 하면, 나처럼 하면 성공할 수 있다’는 성공신화가 자유를 보상해줄 것처럼 등장한다. 그리고 철저하게 계산된 계약서가 청년들의 발목을 잡는다. 1953년 제정된 한국의 노동법은 세월에 따라 개정을 거듭했지만, 타인의 노동력을 갈취하려는 이들은 언제나 그 빈틈을 찾아낸다. 계약서에 갑으로 표기되는 이들은 청년들의 노동을 합법적으로 사용할 방법들을 어떻게든 찾아낸다. 이번 사태에서도 그렇다. 3개월 단위로 쪼개진 계약서는 고용 불안을 을에게 전가하고, 산재 처리와 퇴직금을 받지 못하도록 교묘하게 법의 허점을 노린다. 한 청년의 사망은 그 자체로도 비극이지만, 천민자본주의의 민낯이기도 하다.
이 글을 쓰려고 며칠 고민하는 사이, 갑은 을의 가족에게 합의금을 건넸고 법조망을 빠져나갔다. 자본주의라는 매트릭스에 갇힌 우리는 이내 모든 걸 잊게 될 것이다. 성공을 해야만, 자유를 획득할 수 있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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