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일보 통신원 제1호’ 안병영 전 부총리…"이념 극한 시대, 중앙일보가 제3의 길 보여주길"

2025-12-30

“아무리 어려운 시대라 하더라도 신문은 공론의 장을 만들고, 매서운 기세로 서릿발 같은 비판을 해야 합니다. 중앙일보가 앞으로도 그런 역할을 잘해낼 거라 믿습니다.”

30일 안병영(85) 전 교육부총리(연세대 명예교수)는 올해 창간 60주년을 맞은 중앙일보를 향한 기대와 당부를 담아 이렇게 말했다. 1995~97년 교육부 장관, 2003~2005년 부총리 겸 교육인적자원부 장관을 역임했던 그는 중앙일보와 특별한 인연이 있다. 60년 전 본지 창간 당시 오스트리아에서 유학하면서 유럽 관련 기사를 기고하는 통신원으로 일했다.

은퇴 후 강원도 고성에서 농사를 짓고 있는 그는 성탄절인 지난 25일 블로그에 '중앙일보 통신원 제1호’이라는 제목의 글을 올렸다. 그는 “최근 중앙일보가 창간 60주년을 맞았다는 보도를 접하면서, 그간 까맣게 잊고 살았던 옛 기억이 되살아났다”며 “모진 세월의 흐름 속에 그때 일은 내 기억에서 거짓말처럼 거의 지워졌다가 마치 전기충격을 받은 듯 옛 기억이 되살아났다”고 밝혔다. 장관, 교수로 활동하면서 중앙일보에 수차례 인터뷰를 하고 기고문도 썼지만, 통신원으로 활동했던 기억이 좀처럼 떠오르지 않았다고 한다.

연세대 정치외교학과를 졸업한 그는 1965년부터 오스트리아 빈 대학에서 정치학 박사 과정을 밟았다. 출국에 앞서 홍종인 당시 한국신문연구소 이사장(1903-1998, 전 중앙일보 고문)에게 인사차 들렸는데, 홍 전 이사장은 그를 창간(1965년 9월 22일)을 일주일 앞둔 중앙일보 편집국으로 데려갔다. “이제 언론도 세계와 호흡해야 해, 그래야 큰 신문이 될 수 있다”며 안 부총리를 중앙일보 편집국에 소개했고, 그렇게 통신원이 됐다.

창간을 준비하던 당시 편집국의 모습을 두고 안 부총리는 “모두가 바삐 움직이고, 엄청나게 북적였다. 한마디로 북새통이었다”고 전했다. 그는 “당시는 우리나라가 최빈국에서 벗어나기 전이었고, 1965년 한일협정 소용돌이에 국민의 저항이 거센 시기였다”며 “그 격변기에 중앙일보의 창간을 맡은 사람들도 마음이 무거웠을 것이라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이어 “그래도 큰 신문사가 될 거라는 예상은 들어맞았다”고 덧붙였다.

안 전 부총리는 오스트리아 총선, 당시 유럽에 잔존한 소련의 영향력 등을 분석하는 기사를 송고했다. 유럽의 히치하이킹 풍속 등 생활밀착형 기사도 쓰기도 했다. 중앙일보는 그에게 매달 한 달 분의 신문을 배편으로 보냈다고 한다. 그는 “한 달 전의 구문(舊聞)이었지만, 한국 소식이 무척이나 목말랐던 당시 그것은 더할 수 없이 귀한 선물이었다”고 회고했다.

유학생 시절을 떠올리며 안 전 부총리는 “중립국이었던 오스트리아를 선택한 건 좌우와 대립하는 상황에서 한국의 미래를 위한 제3의 길이 있는지 찾기 위한 목적도 있었다”고 말했다. 때문에 최근 우리 사회의 격화된 진영 간 대립, 이념적 양극화를 바라볼 때마다 안타깝다고 했다.

그는 “내 편, 네 편이 갈라지고, 정치적 입장이 다르면 가까운 친구, 심지어는 가족 사이도 마치 남남처럼 멀어진다”며 “우리의 정치 세계는 이미 합의와 상생, 균형과 조화의 선진 민주주의의 기본 룰을 잊은 지 오래다”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대결보다는 협력, 가시적 힘의 과시보다는 이성과 과학적 접근, 그리고 따뜻한 ‘무티(Mutti·모성) 리더십’이 돋보이는 독일의 전 총리 앙겔라 메르켈의 정치적 리더십 스타일을 소개하고 싶다”라고도 했다.

안 부총리는 "한국 사회가 난국에서 벗어나려면 정책 당국자와 이해 당사자, 전문가와 국민 사이 끊임없는 대화와 타협이 필요하다"고 강조하면서 “좌우가 대립하고 이념이 극한으로 치닫는 동안에 중앙일보가 제3의 길로 미래를 보여주길 바란다”며 당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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