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원상가 천재'김아영 "AI기술 유용하지만 뼈대인 아날로그가 훨씬 중요"

2025-05-23

LG구겐하임상 작가 김아영 서울서 신작 공개

아뜰리에 에르메스 'Plot,Blop,Plop'전(~6/1)

부친이 건설한 중동아파트에 석유패권 대입한 역작

[서울=뉴스핌]이영란 편집위원/미술전문기자=요즘 우리 현대미술의 '대세' 작가는 단연 김아영(B.1979)이다. 글로벌 무대에서 각광받고 있는 이불·서도호·양혜규 등에 이어 김아영은 최근 전세계 주요미술관과 비엔날레로부터 많은 제안을 받고 있다.

서울 종로의 50년도 더 된 복합건물인 낙원상가(1969년 건립)에서 작업해 '낙원상가 천재'로 불리는 아티스트 김아영은 요즘 몸이 열개라도 모자랄 정도로 바쁜 작가다. 'AI융합 아트'의 기수로 손꼽히는 그는 작년에 국립아시아문화전당이 수여하는 'ACC미래상'을 받았고, 올 3월에는 세계적인 미디어 예술상인 'LG구겐하임 어워드'의 한국인 첫 수상자로 선정되기도 했다.

지난 2월 독일 베를린의 함부르거 반호프 뮤지엄에서 개인전 'Many Worlds Over'(~7월20일)를 개막했는가 하면 미국을 대표하는 현대미술관인 뉴욕의 MoMA PS1 개인전(11월~)과 뉴욕 퍼포마비엔날레(11월~), 홍콩 M+ 파사드 작품상영(10월~)이 잡혀 있다. 내년에도 세계 주요미술관에서의 전시가 이어진다.

국내에서도 '딜리버리 댄서의 구' 작업 등으로 큰 반향을 일으킨 김아영이 서울에서 개인전을 열고 있다. 김아영은 서울 도산공원 앞 아뜰리에 에르메스(관장 안소연)에서 신작을 공개하며 작품전을 갖고 있다. 지난 3월 21일 막을 올려 오는 6월 1일까지 이어지는 개인전의 타이틀은 '플롯, 블롭, 플롭(Plot, Blop, Plop)'이다.

'플롯, 블롭, 플롭'은 운을 맞춘 듯한 단어들로 입안에서 '철썩'하고 터지는 방울소리를 연상시킨다. 유희적으로 느껴지는 단어들이지만 김아영은 세심하게 운율을 맞추고, 단어들의 의미를 숙고하고 조합해 이를 선택했다. 번역을 하자면 '구획, 방울, 퐁당'이 되는데 작가는 이야기에서의 '플롯'이 사건들의 사슬을 씨실 날실처럼 짜고 직조해 서사를 만드는 본래 역할과 함께, '플롯'의 중의적 쓰임새에도 주목했다. 즉 영토, 지리, 경제와 관련해 장소를 구획하고 도면을 그리며 동선과 시노그라피(무대 묘사)를 계획하는 일, 더 나아가 음모나 작전을 획책한다는 뜻의 'Plot'의 또다른 의미에도 착안했다.

이같은 구상 아래 김아영은 데뷔 때부터 지속적으로 관심을 가져온 절대 자본이자 권력인 '석유'(액체)와 관련한 서사에 다시 주목하며, 이번에 전과는 다른 다중적인 세계를 시연했다. 즉 종전 작업에서 중요한 모티프로 전개됐던 석유를 개인적 서사와 연결하고 믹스하면서 거대 서사와 미세 서사가 만나고, 오버랩되며 충돌 변주하는 영상작품을 선보인 것이다.

이번에 공개된 신작은 김아영의 10년 전 작업인 '제페트' 연작의 광범위한 시공간과 내러티브를 작품 배경으로 하되, 사우디아라비아 리아드의 '알 마터 주택단지'라는 특정장소를 무대로 한 작품이다. 한국의 한양건설이 지은 리아드의 아파트단지를 현재의 시점과 걸프전쟁이 발발했던 1991년 시점을 플래시백으로 오가며 입체적이면서도 독특한 작품으로 완성했다. 알 마터 주택단지는 김아영의 작품에서 시대를 증언하는 장소로 등장한다. 이 아파트 단지는 작가의 부친이 현지에 건설인력으로 파견돼 지은 것이다.

1970년대 전세계를 휘몰아친 두차례의 오일 쇼크는 개발도상국이었던 한국에겐 말할 수 없는 충격이었다. 당시 경공업에서 중화학공업으로 선회하던 한국은 큰 위기에 봉착했고, 돌파구를 찾기 위해 건설사들의 중동 진출이 봇물 터지듯 이어졌다. 1970,80년대 '열사의 나라'로 떠난 한국 건설인력들의 분투로 인해 우리는 석유파동을 무사히 넘기며 경제발전의 토대를 닦을 수 있었다. 당시 수많은 가장들처럼 중동에 파견됐던 작가의 아버지 또한 중동 여러 도시의 인프라시설 건설에 참여했는데, 부친이 몸담았던 한양건설이 시공한 프로젝트 중 하나가 바로 알 마터 단지였다.

현지 교민들 사이에 '한양 아파트'라 불리던 이 장소는 입주도 하기 전에 석유와 걸프만 확보를 노린 이라크의 쿠웨이트 침공(1990년)으로 난민들의 임시거주지가 됐다. 때문에 오랫동안 '쿠웨이트인 아파트'로 불렸다. '석유' 때문에 발발한 이 국지전은 미국까지 참전하며 걸프 전(1990–91년)으로 확대됐고, '사막의 폭풍작전'이라 불린 최전방의 전투장면은 CNN을 통해 전세계로 송출되며 전지구인이 전쟁극장을 관람하게 했다

'석유'는 김아영의 몇몇 작품들에서 중요한 모티프로 작동해왔다. 그것은 근대주의를 가능케 한 도구이자 권력이며 물리적 이동과 속도의 에너지원인 동시에, 지정학적 분쟁 요소, 지질과 기후를 변화시키는 요인인 까닭에 작가는 중요한 이슈로 끈질기게 주목하고 있다. 이같은 거대한 서사와는 별개로, 리아드의 '쿠웨이트 아파트'라는 장소는 작가에게 '꿈과 기억'의 무대이기도 하다. 그곳은 아파트 건설에 참여했던 작가 아버지와 수많은 동료들의 기억이 서려 있는 장소이자, 먼 이국 소식과 작은 선물에 기뻐하던 어린 시절 작가의 꿈이 서려 있는 곳이기도 하다.

작품을 위해 김아영은 사전 아카이브 탐색에 나섰는데 사우디의 살만 벤압둘아지즈 국왕이 쿠웨이트 난민 1000가구를 수용했던 사실을 전한 방송클립과 걸프전 참전군인의 전쟁을 목전에 두고 밝힌 소회, 전쟁 확전을 예상치 못한 사담 후세인의 화급하고 비밀스런 음성 등을 채집했다. 김아영은 또 리아드 현지를 찾아 아파트 거주민의 "남동풍이 불고 전망이 좋아 알 마터 아파트를 택했다. 리야드에서도 고급축에 속하는, 잘 지어진 아파트다"라는 평화로운 소회를 통해 1990년대 현재를 조망하고 있다.

김아영은 이처럼 분절된 이야기들을 솜씨좋게 이어붙이고 구조화하는 스토리텔링에서의 '플롯'과 함께, 공간을 구획하고 도면을 그리며 동선과 시노그라피를 제시하는 공간적인 장치로 '플롯'의 다중적인 의미와 기능을 실험하며 이번 작업을 완성해냈다.

작가는 사우디에서의 현지 실사촬영에 더해 생성형 AI V2V(Video-to-Video) 영상변환, 라이다 스캔, 3D 가우시안 스플래팅, 게임 엔진 애니메이션, 2D 아카이브 애니메이션 등 탈광학적 이미지를 과감히 혼합하고 변주하며 '트랜스미디어의 실험'을 추진했다.

이번 작업에서 기억과 기록, 허구와 사실이 서로 겉돌지 않고 정교하게 교차하면서 사변적 허구를 마치 실제처럼 구현할 수 있었던 것은 지난 10년간 발전한 광학 테크놀로지와 이를 자유자재로 활용하고 실험하는 작가의 작업방식 때문에 가능했다. 김아영은 '이거다' 싶은 주제를 재탐사해서 시각적·공간적 레이어를 더하고, 밀도를 높이면서 확장된 세계를 우리 앞에 제시한 셈이다.

김아영은 동시대 사건들의 인과관계를 세계의 기원에서부터 다가올 미래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한 시공간 속에서 추적하고 상상하며 작품을 만든다. 경계와 세계를 넘나드는 공간운동을 비롯해 혼성과 합성을 통해 구축한 거대 담론들은 허구의 세계를 향해 거침없이 나아간다. 그러나 흥미로운 것은 그 출발점이 언제나 현실에 대한 첨예한 문제의식에서 비롯된다는 점이다.

주어진 역사를 새롭게 사유하고 창의적인 이야기를 덧대는 방식의 사변적 서사는 작가가 집중적으로 추구하는 작업스타일이다. 그 기반에는 전문가들과의 협업을 통한 전방위적 리서치가 깔린다. 역사와 과학, 신화와 지정학, 테크놀로지에 이르기까지 낙원상가에서 가까운 정독도서관 등 여러 기관을 무수히 드나들며 아카이브 자료를 축적한다. 반면, 광범위한 역사의 시공간에서 작은 흔적들에 불과한 단서들 사이에는 '무수한 공허와 빈틈'이 존재하는데 이것이 작가의 '신나는 창의의 영역'이다. 김아영은 매끈하지 않은 부정합과 비선형적 내러티브를 구성하고, 교차와 직조를 통해 다성적인 목소리를 켜켜이 쌓아간다.

안소연 아뜰리에 에르메스 관장은 "김아영 작가가 2014–2015년에 3부 연작으로 선보였던 '제페트, 그 공중정원의 고래기름을 드립니다, 쉘'이 인상적이었다. 석유의 기원과 신화, 석유의 자본화와 신식민주의 등 20세기 역사를 석유의 관점에서 재구성한 이 연작을 계기로 작가의 시야가 보다 넓게 확장됐다"며 "그 연작이 소리와 음악으로만 남아 아쉬워 이를 입체적으로 확장하면 어떨까해서 제안했다. 10년이 지난 시점에서 공중에 음성으로 떠다녔던 '제페트'연작을 이번에 작가가 시각적으로 멋지게 구체화했다"고 평했다.

안 관장은 또 "김아영은 고대신화에서부터 미래까지 작품의 시공간이 넓고 레이어가 두터워 해외에서도 주목하는데 이런 경우 자칫 출발하는 닻을 끊어버리고, 작업이 하늘로 날아갈 수도 있다. 하지만 그는 현실에 단단히 뿌리를 내리고, 가상과 실제를 매우 탄탄하게 교차시키고 있다. 앞으로의 작업도 기대된다"고 강조했다.

한편 김아영은 지난 5월 8일 뉴욕 구겐하임 뮤지엄에서 전세계 미술관계자들이 참석한 가운데 'LG구겐하임 어워드'를 수상했다. 여기서 그는 "인공지능(AI) 기술의 발달로 인해 현대예술의 속성은 변화할 수 밖에 없다. 나 역시 인공지능 기술 등을 다양하게 작업에 활용하고 있다. AI는 창작을 돕는 훌륭한 도구다. 그러나 AI가 만든 창작물은 예술의 근본적인 조건인 작가의 의도와 창작과정에 수반되는 고통, 작가의 내면에서 나오는 깊이있는 사유가 결여돼 예술로 보는 것은 아직 시기상조라 생각한다"고 밝혔다.

◆에르메스 재단(FONDATION D'ENTREPRISE HERMÈS)은?=2008년에 설립된 에르메스 재단은 "우리의 행동은 우리를 정의하며, 우리가 누구인지를 보여준다"라는 정신에 바탕을 두고 있다. 재단의 핵심 미션은 네가지로 압축된다. △기술과 전문성의 전수 △새로운 예술창작 활동 △환경보호및 사회적 연대 장려 △이를 위한 기획프로그램 운영과 미래를 생각하며 행동하는 이들의 후원 등이다. 에르메스 재단은 올리비에 푸르니에가 2016년부터 재단 이사장을, 2021년부터 로랑 페주가 재단 디렉터를 맡고 있다. 재단은 2023~2028년 기간에 6100만유로(한화 약 955억원)의 예산을 편성해 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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