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작품은 단순히 로봇의 로맨스가 아니에요. 인간보다 더 인간적인 ‘철학극’(philosophical drama)입니다.”
7일(현지시간) 저녁 미국 뉴욕 맨해튼의 유서 깊은 벨라스코 극장 앞. 상기된 표정으로 극장을 나서는 뉴요커 레인 앤더슨(65)은 한국 창작 뮤지컬 ‘어쩌면 해피엔딩’(이하 ‘어쩌면~’, 미국 작품명 ‘Maybe Happy Ending’)을 관람한 뒤 “환타스틱(Fantastic)!”을 연발하며 이렇게 말했다. 함께 공연을 본 부인 킴벌리 앤더슨(64)은 ‘엄지 척’을 하며 “로봇이 인간보다 더 따뜻한 사랑을 나누는 것 같았다. 감정이 북받쳐 눈물이 흐르지 않을 수 없었다”고 했다.
9년 전 서울 대학로의 한 소극장에서 출발한 창작 뮤지컬이 뮤지컬의 본고장이라는 뉴욕 브로드웨이에서 ‘K-뮤지컬’의 저력을 입증하며 파란을 일으키고 있다. 제78회 토니상 시상식(현지시간 8일 저녁)을 앞두고 작품상·극본상·음악상 등 10개 부문 후보에 오른 ‘어쩌면~’에 대한 현지의 관심은 더욱 커진 분위기다. 뮤지컬계의 아카데미상이라 불리는 토니상에서 작품상 트로피를 받는다면 한국 창작 뮤지컬 최초의 수상이라는 쾌거를 기록하게 된다. 이날 벨라스코 극장 앞에서 만난 존 테일러(48)는 “토니상 노미네이트 소식을 듣고 티켓 예약을 했다”며 “오늘 직접 보니 수상할 자격이 더없이 충분하다”고 말했다.

뮤지컬은 가까운 미래 인간을 돕기 위해 만들어졌지만 이제는 보잘것없는 구형 ‘헬퍼봇’ 올리버와 클레어의 이야기다. 서로 다른 성격 탓에 처음엔 삐걱거리던 둘은 올리버가 그리워하는 옛 주인 제임스가 살던 제주도로 함께 여행을 떠나면서 이전에는 없었던 새로운 ‘감정’을 경험하게 된다. 어느덧 가까워진 둘이 사소한 일로 심하게 다투는 여느 연인들의 감정을 느껴보자며 ‘빙의’에 빠지듯 커플 연기를 하는 모습에 객석을 가득 메운 관객들은 폭소를 터뜨렸다. 여행을 통해 서로에게 마음을 연 둘이 ‘사랑’이라는 감정을 느낀 끝에 키스를 하는 장면에서는 관객들이 일제히 박수를 치며 응원하기도 했다.
올리버 역을 맡은 배우 대런 크리스는 구형 로봇의 삐걱거리는 기계음과 ‘사랑에 빠진 소년’에게서 느껴질 법한 감성을 동시에 완벽하게 표현한다. 클레어 역을 맡은 중국계 미국 배우 헬렌 셴은 통통 튀는 활기찬 매력 뒤에 숨겨진 슬픔과 체념의 복잡한 감정을 섬세하게 그려낸다. 둘이 만들어낸 하모니에 막간 휴식 없이 한달음에 이어진 2시간이 훌쩍 지나갔고, 엔딩 장면에서 관객들은 기립박수를 보냈다.

‘어쩌면~’은 뮤지컬 ‘번지점프를 하다’ ‘일 테노레’ 등을 함께 만든 ‘윌휴 콤비’ 박천휴 작가와 작곡가 윌 애런슨의 작품이다. 지난해 10월부터 1000석 규모의 뉴욕 벨라스코 극장에서 프리뷰 공연을 시작한 영어 버전 ‘Maybe Happy Ending’은 한국 버전과 큰 틀에서 비슷하나 구성과 무대연출에서 약간의 변주를 줬다. 2023년 ‘퍼레이드’로 토니상 최우수 연출상을 받은 마이클 아덴이 영어 버전 연출을 맡으면서 생긴 변화다. 올리버와 클레어가 옛 주인과 함께한 기억을 떠올리는 회상 장면은 마치 SF 영화를 보는 듯 화려한 무대가 펼쳐지고, 디지털 숫자 전광판이 무대 한쪽에 설치돼 관객들이 공연 흐름을 놓치지 않게끔 돕는다.
관객들 반응은 뜨겁다. 지난해 11월 정식 개막 후 현지에서 입소문을 타기 시작해 한 달 만인 12월부터 꾸준히 객석 점유율 90
%
이상을 기록해 왔다. 지난달부터 ‘토니상 후보작 프리미엄’까지 붙어 빈 자리를 찾기 힘들 만큼 글로벌 관객몰이에 성공했다. 뮤지컬 애호가라고 자신을 소개한 30대 뉴요커 줄리아 스콧은 중앙일보에 “스토리텔링과 감정 전달이 모두 완벽한 작품”이라며 “브로드웨이 대작들과 비교해도 결코 밀리지 않는다”고 평했다.
☞토니상=미국 연극·뮤지컬 분야의 가장 권위 있는 상으로 연극은 1947년, 뮤지컬은 1949년에 첫 시상을 했다. 정식 명칭은 ‘앙투아네트 페리 연극상’(Antoinette Perry Award for Excellence in Theatre). 마리 앙투아네트 페리라는 20세기 초 미국의 유명 여성 연극인의 이름을 따 왔다. 이번 상은 지난해 4월 26일에서 올해 4월 27일 사이 브로드웨이에서 공연된 연극과 뮤지컬이 시상 대상이다.
김형구([email protect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