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배간 남편 일으킨 시인 아내, 친구처럼 지낸 40년 금슬

2025-05-29

유희춘과 송덕봉 부부 이야기

“우리 사이 세상에 둘도 없다 자랑치만 말고 나를 생각해 착석문을 꼭 읽어 보시구려. 군자는 광대하여 막힘이 없어야 하나니 옛날의 범(范) 군자는 밀 배를 통째로 주었다지요.”(『덕봉집(德峰集)』)

친정아버지 묘비를 세우는 일로 동분서주하던 송덕봉(1521~1578)은 전라도 관찰사로 있는 남편 유희춘(1513~1577)에게 위 시와 함께 ‘착석문(斲石文)’이라는 장문의 글을 보낸다. 아버지 송준의 묘비에 사위 된 자가 남 일 보듯 뒷짐을 지고 있는 것에 부아가 난 것이다.

“40, 50말 쌀이면 될 것을 귀찮게 여기니 분통이 터져 죽을 지경이오.”

덕봉이 예로 든 범씨 군자는 아버지 범중엄의 영으로 밀 500석을 운반해 오다가 가족의 잇따른 초상으로 곤란을 겪는 친구에게 배를 통째로 준 송나라 범순인(范純仁)이다. 송덕봉은 “나는 베풀기는 박하게 하면서 바라기는 두텁게 하는 그런 사람이 아니다”라고 한다.

병약한 남편 위해 종을 첩으로 보내

“섭섭지 않게 베풀었다”편지에 생색

“남편 술 모른다” 책망한 대범한 아내

첩 소생 네 딸 살뜰히 챙겨 남편 감동

아내가 화답한 시에 다시 남편 화답

남편 별세 1년 후 아내도 세상 떠나

이 부부는 이렇게 다투기도 하지만 대체로 배려와 대화가 일상화된 최고의 금슬을 자랑한다. 우리가 만날 수 있는 이들의 모습은 『미암일기(眉巖日記)』에 수록되어 있는데, 그들의 마지막 10년의 기록인 셈이다. 즉 1567년(선조 즉위년)에서 1577년(선조 10)까지, 유희춘이 19년의 유배에서 풀려나 아내 곁으로 돌아오면서 쓰기 시작한 일기다. 전하고 있진 않지만, 유희춘은 오래도록 일기를 썼을 것이다. 더구나 독서와 교육, 저술에 몰두한 극변의 유배지에서 자기와의 대화이자 성찰의 벗인 일기를 어찌 쓰지 않을 수 있으랴. 일기 형식의 기록은 유희춘 가계의 전통이기도 하다. 일찍 세상을 뜬 아버지 유계린(1478~1528)과 형 유성춘도 일기를 남겼고, 외조부 최부(1454~1504)가 남긴 『표해록』도 일기 형식의 글이다. 유배에서 풀려나 잠시 고향의 옛집에 머물던 유희춘은 책더미 속에서 아버지와 형의 일기를 발견하고 그들에 대한 추억으로 슬픔을 이길 수 없는 지경이 된다.

해남의 유희춘과 담양의 송덕봉은 혼인으로 맺은 40년 세월을 벗처럼 동지처럼 산 귀한 모델이다. 유희춘의 본가가 있는 해남은 순천의 유계린이 해남 최부의 딸 탐진최씨에게 장가를 들면서 정착한 곳이다. 16세기에는 처변(妻邊) 거주가 일반적이라 태어나고 자란 외가를 본가로 삼는 경우가 많았다. 유희춘도 해남을 본가로 하지만 나중에는 처가가 있는 담양에 정착하는 것을 볼 수 있다.

별거 기간 길어 아내 시인 된 듯

유희춘의 일생은 대강 네 단계를 보이는데, 혼인 전의 약 25년, 과거 급제 후 10년의 사환기(仕宦期), 20여 년의 유배기, 해배 후 10년의 벼슬살이와 귀향이 그것이다. 알려진바 유희춘은 1547년(명종 2) 양재역 벽서 사건에 연루되어 유배로 19년을 보낸다. 새 왕의 즉위와 함께 해배되면서 관직으로 복귀한 것이다.

“유희춘은 방면하고 직첩을 도로 주라.”(선조 즉위년 10월 12일) 귀양살이에서 갈고 닦은 학술과 지혜를 검증하는 시간이 돌아온 것이다. 대사헌이나 관찰사에 임명되기도 하지만, 그는 서적과 학술을 다루는 직임에 어울렸다. 공사(公私)를 넘나드는 10여 년의 기록 『미암일기』는 개인과 가족은 물론, 사회와 국가의 일을 포괄하는 내용들이다. 유희춘은 홍문관 부제학을 끝으로 새집을 지어놓고 행복한 노후를 꿈꾸는 아내 곁으로 돌아온다.

따지고 보면 유희춘과 송덕봉의 혼인 생활 40년에서 공간을 함께 한 날은 몇 년 되지 않는다. 혼인 1년 만에 급제한 남편은 서울로 벼슬살이 가고 아내 덕봉은 시어머니 봉양에 농사를 관리하고 두 아이를 낳아 기르는 바쁜 나날이었다. 덕봉이 서울에 다녀간 것이 평생 서너 번에 불과하다는 것으로 보아 부부는 주로 편지로 정을 나누었던 것 같다. 송덕봉이 시인이 될 수 있었던 것은 부부 별거의 힘이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든다.

그런데 만나면 곧 헤어져야 했던 10년 혼인 생활도 담양과 함경도 종성(鍾城)으로 갈라지는데, 가히 3000리 길이다. 유희춘의 처음 유배지는 제주였는데, 고향 해남과 가깝다 하여 1달 만에 함경도 극변으로 옮겨간 것이다. 극한 오지로의 유배는 살아서 돌아오는 경우가 드물었다. 날씨와 풍토 등의 낯선 자연환경도 그렇지만 숙식 문제가 무엇보다 컸고 가족과 사회로부터 분리된 심리적인 외로움은 어떻게 이겨낼 수 있었을까. 극지에서 살아남은 유희춘, 이 가족에게 비책이라도 있었던 것일까.

첩 소생 네 딸 모두 면천

과연 그랬다. 송덕봉은 병약한 남편의 수발을 위해 사비(私婢) 굿덕(仇叱德)을 유배지로 보내는데 이른바 천첩(賤妾)의 자리였다. 굿덕의 나이는 유희춘보다 15살이 적었으니 1528년생, 당시 나이 21세였다. 앞에서 소개한 ‘착석문’에서 송덕봉이 남편을 향해 “섭섭하지 않게 베풀었다”는 말이 바로 이런 맥락 아닐까. 유희춘은 굿덕으로부터 충실한 내조를 받은 것은 물론 네 명의 딸까지 얻는다. 딸의 이름은 해성(海成)·해복(海福)·해귀(海歸)·해명(海明)이다. 천출 자식이면 나 몰라라 하던 보통의 아버지와는 달리 유희춘은 네 딸을 면천시키는 일로 고심이 많았다. 이는 속량(贖良) 값을 마련해야 하는 경제적인 문제와 행정 절차의 문제 등 매우 까다로운 공역이 요구되는 일이었다. 유희춘은 1561년생 막내딸 해명에게 혼담이 들어오자 속량을 서두른다. “얼녀 4명이 모두 노비의 신분을 벗어나 양인이 되었으니 얼마나 다행한 일인가.”(『미암일기』, 1575년 11월 28일) 행정적인 절차로 “해명의 면천을 위해 관에 제출한 문서 초안을 작성했다”(1576년 3월)는 기록은 그가 세상을 뜨기 1년 전의 일이었다. 그만큼 아버지로서의 책임을 다하고자 한 유희춘이었다. 첩과 얼녀 관련의 일은 본처의 승인이 없이는 어려울 수 있다. 여기서 지음(知音)이자 문우(文友)이자 아내인 송덕봉의 그릇에 주목하게 된다.

송덕봉은 시어머니 상을 당하여 홀로 3년 상을 치르고 비로소 남편을 보러 3000리 길에 오른다. 1560년 40세의 송덕봉은 그때의 감회를 한시로 남겼다. “걷고 또 걸어 마천령에 이르니, 동해가 거울처럼 끝없이 펼쳐졌구나. 부인의 몸으로 만리 길 어이 왔는가, 삼종(三從) 의리는 무겁고 이 한 몸 가볍기 때문이지.”(‘마천령 위에서’) “당신의 시 자랑은 겸양이 없으니 맑기가 어찌 상강의 가을물 같으리까. 소년 같은 운우(雲雨)의 꿈일랑 떨쳐버리고, 사물에 무심하면 대항할 이 없으리라.”(1566년, ‘미암의 시에 장난치다’)

공부에 속도가 붙은 남편은 아내에게 시를 보내며, 꽃이나 음악, 술 이런 것에 도통 흥미가 없고 오로지 책 속에서 지극한 즐거움(至樂)을 누리노라 자랑한다. 아내는 달 아래 거문고 연주와 술기운에 호탕해지는 마음, 그 큰 즐거움도 모른 채 “어째 책 속에만 빠져 있소?”라고 반격한다. (‘차지락음·次至樂吟’) 이들의 시는 대체로 남편의 시에 아내가 차운(次韻)하고, 아내의 시에 남편이 화답하는 방식의 대화이다. 송덕봉은 여성으로는 드물게 이름 외에 호와 자(字)를 지녔다. 특히 자 성중(成仲)은 유희춘의 자 인중(仁仲)에 조응하는 것으로 친정아버지 송준이 지은 것이다. 부부가 함께 ‘인(仁)을 이루라’는 주문이다.

송덕봉은 그가 누구이든 인간에 대한 배려가 몸에 밴 사람이었다. 남편 유희춘이 신의를 저버린 옛 친구를 질타하자 송덕봉은 위로의 말을 건넨다. “남이 나에게 신의를 저버릴지언정 나는 남의 신의를 저버리지 맙시다. 우리는 절대로 그러지 맙시다.”(『미암일기』, 1569년 8월 12일) 서녀 해성이 아버지를 뵙고 내려가자 송덕봉은 여종을 딸려 보낸다. 유희춘은 서녀들을 어루만지고 아껴주는 아내에게 감동한다.(『미암일기』, 1569년 9월 17일) 유희춘은 아내가 그동안 써 온 작품들을 엮어 문집을 만드는데, 한시 38수가 담긴 『덕봉집』이다. 덕봉은 자신의 시집을 안고 한편 기뻐하면서 한편 사라진 시들을 아쉬워한다. “매우 기쁘고 이 시가 영원토록 없어지지 않고 전해질 수 있게 되었지만 희비가 엇갈린다.”(1571년 3월)

언어 타락의 시대에 빛나는 부부의 품격

벼슬에서 물러나 집으로 돌아온 유희춘은 아내가 지은 집을 보고 감동의 시를 지어 올린다. “부인의 마음과 솜씨 옛 반수(班垂·춘추시대 건축가들) 같구려. 남쪽으로 열린 서실 밝고도 산뜻하고 북쪽 서까래 밑에는 다락을 놓았네. 늙은이는 창에 기대어 넉넉함을 즐기고, 자손들 책을 펴 글 읽는 소리 낭랑하네.”(『미암일기』, 1576년 2월 15일)

이로부터 1년 후 남편 유희춘이 세상을 떠나고 또 1년 후 아내 송덕봉이 세상을 뜬다. 큰 자리를 꿈꾸는 자들이 혐오의 언어를 남발하는 이 시절에 송덕봉과 유희춘 부부의 품격을 다시 보게 된다.

이숙인 동양철학자·서울대 규장각 한국학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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