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로 산다는 건

2025-05-07

영국문화협회가 세계 102개국 4만 명을 대상으로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영어 단어를 묻는 설문 조사를 했더니, 여기서 1위를 차지한 단어는 “Mother(어머니)”였다고 한다. 2위는 Passion(열정), 3위는 Smile(미소)이고, 이어 Love(사랑) Eternity(영원) Fantastic(환상적) Destiny(운명) Freedom(자유) Liberty(자유) Tranquility(평온)가 꼽혔다. Peace(평화)는 11위를 차지했으며 Lollipop(막대사탕)이 42위, Hiccup(딸꾹질) Gum(껌) 등이 63위, 69위를 차지해 눈길을 끌었다.

그렉 셀비 영국문화협회 대변인은 “70개 단어 가운데 사람들 사이의 직접적인 관계를 나타내는 유일한 단어인 ‘어머니’가 1위에 올랐다는 사실이 흥미롭다”라며 “부정적 단어보다는 자유, 평화, 영원 등 긍정적 단어가 순위 안에 포함됐다”라고 말했다. 그러나 아버지(Father)는 ‘어머니’ 다음인 2위도 3위도 아니고 막대사탕이나 껌보다도 순위에 밀려 아쉽지만 70위 안에도 들어가지도 않아 ‘어머니’와 대조를 이뤘다.

가정에서 자녀를 키울 때 부모의 역할은 중요하다. 아버지의 부성은 아기를 몸 안에 품었던 어머니의 모성보다 대략 열 달 늦게 출발한다. 아버지도 어머니처럼 가슴 떨리는 열 달을 보내지만, 부성과 모성은 차이가 있다. 자녀는 어머니와 보내는 시간이 많고 어머니에게 의존하고 언제나 도움을 주는 어머니를 더 좋아한다는 사실을 인정하더라도 아버지들은 가정에서 본인의 역할이나 책임이 중요하고 차지하는 비중이 크다고 생각하지만, 서운한 말이지만 본인을 제외하고는 그렇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지 않은 것 같다.

주말에 공원이나 놀이터에 가보면 가족 단위의 사람들이 많고 특히 아버지가 아이와 함께 놀아주는 모습을 많이 볼 수 있다. 아이들에게 친구 같은 아버지가 되어주는 것을 보면 참 시대가 많이 변했다는 생각을 한다. 필자의 어릴 적 시절에는 아버지와 함께 논다는 것은 상상하기 힘든 일이었다. 아버지는 평양에서 6.25 전쟁을 겪으셨고 경제적인 기반을 다 잃고 1.4 후퇴 때 온 가족을 데리고 이남으로 피난을 내려오셨다. 한국전쟁 속에서 산전수전 다 겪으면서 주린 배를 움켜쥐고 살아야 했던 참담하고 궁핍했던 처절함을 겪으셨다. 맨땅에 헤딩하는 상황에서 무에서 유를 만들어 가족을 지키고 먹고 사는 시급한 문제를 해결하셨던 무용담을 들으면 절로 감탄과 존경심을 가졌었다.

부모가 맞벌이하는 것 자체가 일상이 아니었던 70~80년대 시절, 어려운 여건 속에서 아버지는 바깥에서 돈을 벌어 가족을 먹여 살리기 위해 많은 시간을 쓰고 최선을 다하셨다. 경제적인 문제를 해결하는 것은 아버지의 일이었고 자녀를 돌보고 가정에 신경 쓰는 것은 어머니의 일이었다. 아버지는 자녀를 사랑하셔서 당시 여건에서 가장 좋은 것을 해주시려고 노력을 하셨지만 언제나 무섭고 어렵고 권위적인 분이셨다. 칭찬보다는 꾸지람이 많았고 어떤 일이 생기면 대화를 통한 해결보다는 일방적인 결정을 내렸고 다른 의견을 내면 화를 내시며 무조건 순종하길 원하셨고 엄한 규율을 우선하셨다. 아버지는 물론이고 나도 대화하는 방법에 익숙하지 않아 소통이 쉽지 않았고 거리가 멀어지다 보니 평생 아버지와 속마음을 드러내는 대화다운 대화를 나눈 시간은 그리 많지 않았다.

아버지는 나름 가치관과 판단으로 가족을 위해 헌신하셨지만, 본인의 생각대로 몰아세우는 것에 대해 어린 마음에 이해하기 힘들어 불만이 많았고 화가 나고 서운함이 있었다. ‘부모가 돼봐야 부모의 마음을 안다’고 하는 것처럼 이제 세월이 흘러 필자도 아버지가 되고 할아버지가 되고 나니 이제야 그 당시는 그것이 최선이었을 거라 깨닫고 이해되는 부분이 있다.

남자는 결혼한 후 아내로부터 남편이라는 이름을 얻고, 아이가 태어나면 그때부터 갑자기 ‘아무개’의 아버지로 불리게 된다. 어떻게 자녀를 양육하고 가르치고 어떤 역할을 해야 하는지에 대해 교육을 받거나 생각해 본 적도 없고 아무 준비 없이 어설픈 아버지가 된다. 가족과 가정을 배제하고 나 자신을 생각한다는 것은 불가능해지고 본인을 믿고 인생을 맡긴 아내와 내 능력에 생사가 걸린 아이를 생각하면, 눈앞이 캄캄하고 두렵기만 했던 시절이 있다.

‘아들은 아버지의 등을 보고 자란다’의 저자이고 가족 심리치유 전문가인 최광현 교수는 “우리가 아버지 역할에 대해 배운 곳은 가정이었고, 어린 시절 보았던 아버지였다. 그러니 우리는 무의식적으로 지난날 아버지의 행동과 모습을 따라갈 수밖에 없다. 어릴 때 올려다본 아버지의 뒷모습이 내가 되었다. 무언가를 알려면 무언가를 배워야 하듯, 아버지가 되려면 우리는 ‘아버지’ 자체를 배워야 한다.”라며 아버지 역할은 아들에게 큰 영향을 미치고 아버지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알아야 한다고 설명한다. 자식은 들어서 배우지 않고 부모의 행동을 보면서 배우고 큰다. 가정을 이끌어가는 아버지는 가장으로서, 경제적으로 정신적으로 가족들을 부양하고 책임을 지고 인도해야 하는 리더로서의 자리는 결코 쉬운 자리는 아니다.

이 땅의 아버지들은 자녀가 이왕이면 좋은 환경에서 살게 해주어야 한다는 책임감을 갖고 있고 자신보다 더 잘 되고 행복하고 나은 삶을 살기를 바라는 마음이기에 탐탁지 못한 부분이 많아 질책과 잔소리가 많아질 수밖에 없다. 그래서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아버지와 자녀 사이가 원만한 적은 많지 않다고 한다.

어린 시절 아버지와 관계가 좋지 않았던 면은 닮지 말고 자식과 솔직한 대화를 하고 편한 관계가 돼야겠다고 생각은 하지만 경청보다는 먼저 내 의견을 내세우는 그토록 싫어하던 아버지의 모습을 내 안에서 발견하고 놀라곤 한다. 자녀의 얘기를 들어주고, 있는 그대로 받아주고 시간이 걸리더라도 조급함을 버리고 기다리는 것이 중요한데도 말이다.

아버지는 사랑하는 아내와 자식들을 위해 거센 비바람에도 자기 한 몸 희생하며 쓰러지지 않기 위해 굳건히 제자리를 지키는 아름드리나무 같은 든든한 인생의 버팀목이다. 그래서 이 세상의 아버지에게는 이제까지 풍파를 이기며 살았던 굴곡진 세월의 흔적과 가족을 지키고 울타리가 되어준 가장의 강인함과 생활의 지혜가 있다. 아버지는 절대적으로 필요하고 누가 뭐래도 아버지는 아버지다.

‘사랑을 지키는 법’의 저자 조나 레러가는 “내 인생의 모든 사람을 둘러볼 때 그들이 내 마음속에 있다면 그것이 바로 최고의 인생이라고 생각한다.”라며 최고의 인생을 정의했다. 과연 나는 내 자녀에게 어떤 아버지로 기억되고 마음속에 남아 있을 것인지, 그러려면 어떤 아버지가 돼야 하는지에 대한 질문에 답하기는 쉽지 않다. 자녀를 누구보다 사랑하는 아버지로 살아야 한다는 책임에 어깨가 무겁고, 아버지라는 이름에 맞는 역할을 찾기 위해서는 많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며 좋은 아버지가 되는 과정과 실천은 아직도 생각만큼 쉬운 일이 아닌 것 같다.

※ 이 글은 본지 편집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Menu

Kollo 를 통해 내 지역 속보, 범죄 뉴스, 비즈니스 뉴스, 스포츠 업데이트 및 한국 헤드라인을 휴대폰으로 직접 확인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