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정치의 주권 개념과 소버린 AI

광복 80주년이 됐건만 주권 수호에 대한 논란은 여전히 분분하다. 그 사례 중 하나가 인공지능(AI) 분야의 주권 수호를 논하는 ‘소버린(sovereign) AI’다. 쉽게 말해 소버린 AI는 자주적 AI 역량을 갖자는 논의다. 단순한 기술 자립을 넘어 외국에 구조적으로 의존하지 않는 자주적 AI 생태계를 구축하자는 데까지 논의가 확장되고 있다. 최근 이재명 정부가 100조원 투자를 통해 ‘국가대표 AI 모델’ 개발과 컴퓨팅 인프라 구축 등을 지원한다고 나서면서 탄력을 받고 있다.
복잡해진 AI 지정학 현실에서 대전환 맞은 근대 주권의 개념
미래 AI 질서는 빅테크 기업이 ‘사실상 통제력’ 장악할 수도
한국의 소버린 AI 담론, 여러 방향으로 나눠져 충돌 가능성
복합적인 주권 개념 유연하게 활용하는 전략적 사고 있어야

소버린 AI의 필요성에 대해서는 의견이 갈린다. 어려운 조건에도 자국산 AI 모델을 독자적으로 개발해야 한다는 ‘자주론’과 그냥 외산 AI 모델을 들여와 개별 분야에 맞게 적용해서 쓰면 된다는 ‘편승론’이 맞선다. 전자가 자칫 시대착오적 ‘디지털 쇄국론’으로 비칠 가능성이 있다면 후자는 외세 의존적 ‘디지털 매국론’으로 치부될 우려를 안고 있다. 이런 조야한 이분법적 구도의 출현은 ‘소버린’, 즉 주권에 대한 개념적 이해가 부족해서 생기는 것 같다.
실질적으론 불평등한 국제정치
사실 주권은 국제정치학에서 오랫동안 탐구해 온 개념이다. 주권 개념은 주로 ‘법·정치적 권위’라는 시각에서 자주·독립으로 이해되지만, 국경을 넘나드는 활동에 대한 ‘사실상 통제력’과 관념 속에서 구성된 ‘당위적 정체성’을 더한 세 차원으로 구성된다. 이렇게 보면 근대 국제정치에서 주권 국가들은 형식적으로는 평등하지만, 실질적으로는 불평등한 권력 현실을 감수해야 했다. 강대국들은 패권이라는 형태로 ‘확장된 주권’을 행사했고, ‘불완전 주권’을 지닌 약소국들은 ‘당위적 주권’의 개념에 기대 이에 대항하곤 했다.
최근 근대 주권의 개념은 큰 전환을 겪고 있다. 특히 지구화와 디지털화는 영토 국가를 중심으로 사고하던 주권 논의를 새로운 지평 위에 올려놓았다. 글로벌 경제의 확장과 신흥 안보 위기의 빈발은 일국 차원의 ‘법·정치적 주권’을 무색하게 만들었고, 다양한 민간 행위자들의 초국경적 활동에 대한 ‘주권적 통제력’도 약해졌으며, ‘당위적 관념’으로 이해되던 국가 단위의 정체성도 새롭게 구성되는 모습이다. 이런 주권 개념의 ‘삼중 전환’은 오늘날 AI 지정학의 현장에서도 진행된다.
미국 AI 생태계에 반기 든 중국
지난달 23일 AI 혁신 가속화와 AI 인프라 구축, 국제 AI 외교·안보 주도 등을 내걸고 발표된 미국의 ‘AI 액션플랜’은 ‘확장된 주권’의 개념이 AI 분야에 투영된 사례다. 이른바 ‘풀스택(full-stack) AI 패키지’의 구상은 중국 견제를 목표로 미국의 AI 생태계를 동맹국들에 부과하려는 패권적 의도를 담고 있다. 과거 미국 기업들이 컴퓨터 운영체계를 장악하여 위세를 떨치던 시절을 연상케 한다. 미래 AI 질서에서도 세계 각국은 ‘형식적 주권’을 유지하지만, ‘사실상 통제력’은 미국 빅테크 기업들이 장악하는 상황이 벌어질지 모른다.
이런 미국의 패권적 행보에 중국이 반기를 들었다. 지난달 26일 상하이에서 열린 세계AI대회(WAIC)에서 ‘중국판 AI 액션플랜’이 발표됐다. 자체 개발한 ‘오픈소스 AI’를 내세워 글로벌 사우스(Global South)를 돕겠다는 제안이 눈에 띈다. 이를 위해 중국은 개도국들의 ‘법·정치적 주권’을 옹호하는 글로벌 AI 거버넌스의 구축을 주장했으며 그 일환으로 ‘AI 분야 유엔’을 연상시키는 세계AI협력기구(WAICO)의 설립을 제안했다. 다른 한편으로는 중국도 ‘디지털 실크로드’ 선상의 개도국들에 대해서 자국의 주권을 확장하려는 ‘사실상 패권’의 역설적 행보를 펼치고 있다.
이런 와중에 프랑스·인도·싱가포르 등이 소버린 AI 달성을 위해 분주히 나섰다. 미국이 동맹국들을 결속하고 중국이 개도국 진영을 결집하는 틈바구니에서 저마다의 AI 역량과 지정학적 위상을 지렛대 삼아 독자적 AI 공간을 확보하려 시도한다. 그 기저에는 당장 상업적 성공을 거두지 못하더라도 외세에 의한 기술 종속을 떨쳐내고 각국 언어·문화의 고유한 정체성을 지키겠다는 ‘당위적 주권’의 개념이 깔렸다. 이 연장선에서 소버린 AI를 추구하지만, 역량은 부족한 나라들이 서로 협력하자는 ‘정체성 연대’의 담론도 커가고 있다.
기반 모델 개발론 대 특화 개발론
한국의 소버린 AI는 어떤 주권 개념을 원용해야 할까? 다양한 진화와 복잡한 전환을 겪고 있는 주권 개념의 어느 한 차원에만 시선을 고정해서는 안 된다. 오히려 세 차원의 주권 개념을 모두 아울러 유연하게 활용하는 전략적 발상이 필요하다. 사실 현재 제기되는 소버린 AI는 아직은 객관적으로 정의할 수 있는 ‘실증적 개념’이 아니다. 오히려 실천적 지식을 구성하는 제도화된 언술(言述) 체계, 즉 ‘실천적 담론’ 정도로 보는 게 맞다. 실제로 현재 한국의 소버린 AI에는 대략 세 그룹의 담론이 제 나름의 개념을 바탕으로 경합하고 있다.
첫째 ‘사실상 통제력’의 확보라는 시각에서 볼 때 현재 가장 대표적인 소버린 AI 담론은 ‘기반 모델 개발론’이다. 한국의 언어와 데이터로 학습한 ‘한국형 AI 모델’을 처음부터 독자 개발(from-scratch)하고 이에 필요한 컴퓨팅 인프라를 국가적 차원에서 지원한다. 그 결과 개발된 AI 모델을 오픈소스로 공유할 뿐만 아니라 이를 계기로 국내 혁신 주체들의 협업을 활성화하여 자주적 AI 생태계를 구축하자는 주장이다.
이에 대해 기반 모델의 개발보다는 기존의 경쟁력 있는 분야를 ‘선택’해 ‘집중’하자는 ‘특화 AI 개발론’이 각을 세우고 있다. 특정 도메인에 초점을 맞춘 ‘버티컬(vertical) AI’나 AI를 적용해 제조업을 업그레이드하자는 ‘피지컬(physical) AI’ 등이 거론된다. 이 과정에서 특정 영역에서는 자주적 AI를 추구하더라도 글로벌 협력을 소홀히 해서는 안 된다는 이른바 ‘투트랙(two-track)’ 담론도 제기되고 있다.
안보·국방에 ‘선별적 제한’ 담론도
둘째 ‘법·정치적 주권’의 행사라는 시각에서 본 소버린 AI 담론이다. 사실상 역량의 차이를 고려해 글로벌 AI 생태계에 접맥할 수밖에 없더라도 외국에 의존해선 안 되는 ‘전략 분야’에는 주권 수호라는 이름으로 ‘선별적 제한’을 두자는 담론이다. 예를 들어 안보·국방과 같은 분야는 핵심 AI 역량이 외국의 통제에 놓이면 위험하므로 독자 개발한 모델을 적용해 그 의존도를 최소화하자는 것이다.
‘기술의 국적’보다는 ‘데이터의 국적’을 강조해야 한다는 ‘소버린 데이터’ 담론도 제기된다. 자국민의 데이터가 외국 기업의 서버에 저장·처리되는 것은 단순한 프라이버시 문제가 아니라 국가안보 문제라는 인식이다. 외산 AI 모델을 사용해서라도 실질적인 ‘소버린 효과’를 얻는 것이 더 중요하므로 이를 위해 고품질 데이터를 주도적으로 통제·관리해 AI 학습에 필요한 데이터 인프라를 자주적으로 구성하자는 것이다.
끝으로 ‘당위적 정체성’의 모색이라는 시각에서 본 소버린 AI 담론은 한국의 언어·문화·가치관을 반영한 AI 모델 개발의 필요성을 강조한다. 주로 영어권에 편향된 데이터를 학습한 글로벌 AI 모델은 역사적으로 이어온 비영어권 국가들의 고유한 언어·문화적 정체성을 반영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각국의 언어·문화 주권의 공간을 지키기 위한 소버린 AI의 기술 및 데이터 역량 확보가 중요하게 된다.
중견국으로서 한국의 역할 주목
그런데 소버린 AI의 개발 의지는 있어도 정작 이를 구현할 기술력을 가진 나라가 몇 안 된다는 점이 문제다. 이 대목에서 소버린 AI의 의지와 ‘풀스택 AI 역량’을 동시에 갖춘 한국과 같은 나라의 중견국으로서 국제적 역할이 주목받는다. 신뢰할 만한 파트너를 찾고 있는 국가들과 연대하는 차원에서 한국이 개발한 소버린 AI 모델을 수출할 수 있으리라는 것이다.
이렇듯 현재 국내의 소버린 AI 담론들은 모두 각기 다른 주권 개념을 바탕으로 각기 다른 전략 방향을 제시하고 있다. 이들의 처방은 모두 부분적 유용성이 있지만, 오늘날 주권 전환의 복잡성을 고려하면 그 어느 하나만으로는 가능하지도 않고 바람직하지도 않으며 간혹 서로 충돌할 수도 있다. 결국 관건은 분야별로 분분한 소버린 AI 담론을 유연하게 엮어 국가적 차원의 실천 전략으로 승화시키는 데 있다. 이를 위해 지금보다 좀 더 복합적인 주권 개념을 실천적 구심점으로 삼는 인식의 전환이 필요하다.
김상배 서울대 정치외교학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