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가을은 이별의 때이다. 푸른 잎으로 화려함을 자랑하던 나무도 가을에는 낙엽을 떨구며 겨울을 준비한다. 한여름 이글거리던 태양도 가을에는 조금씩 밤하늘의 달에게 자리를 내어준다. 언제나 청춘일 줄 알았던 인간도 시간의 주인 앞에 겸손해야 함을 몇장 남지 않은 달력이 말해준다. 모든 건 멈추지 않고 흘러간다. 슬픔도 기쁨도, 절망도 희망도, 승리도 패배도 모두 흘러간다. 그래서 실의에 빠져 절망하는 이에게 누군가는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이 또한 지나가리라”
정들었던 이, 해외에서 숨져
유가족과 출국, 관공서 갔더니
서류 발급 대신 위로 먼저 건네
애도는 안아주기에서 시작

이별의 시간, 빛이 멀어지고 어둠이 깊어지는 시간에 교회는 죽음을 기억한다. 죽음의 문턱을 넘어 천상에 있을 영혼들을 위로한다는 위령(慰靈)의 시간을 보낸다. 떠난 영혼을 위로한다고 하지만 결국 살아있는 이들을 위로하는 시간이다. 죽음만큼 강렬한 이별이 어디 있을까. 신의 아들이라 불리던 예수도 죽음을 피할 수 없었다. 그러니 사별의 아픔에 슬퍼하는 이들을 위로하며 살아 있는 것들에게 ‘너의 죽음을 기억하라(Memento mori)’고 교회는 말한다. 죽음을 향해 가는 너의 삶을 돌아보라는 뜻이다.
최근 나에게도 정들었던 이와의 갑작스러운 이별이 있었다. 마음의 준비 없는 이별이기도 했고 한국이 아닌 해외에서 일어난 이별이었기에 충격은 더욱 컸다. 후회가 파도처럼 밀려왔다. 잘해 줄걸. 고맙다고 말할걸. 안아주고 손잡아 줄걸. 용기가 없어 하지 못 했거나 시간 나면 한다는 핑계로 미루어 놓은 모든 것들이 용기가 나도 시간이 생겨도 할 수 없게 되었다. 속상했다. 미안했다.
더 큰 슬픔을 안은 유가족과 함께 고인이 있는 곳으로 갔다. 하루빨리 돌아가신 분을 한국으로 모시고 와야 했다. 문제는 해외의 행정 서비스였다. 해외의 행정 서비스 악명은 익히 들어 알고 있었다. 해외 유학을 간 동료 사제로부터 또는 주재원이나 이민 등으로 타국에서 살다 돌아온 이들은 한국이 얼마나 살기 좋은 나라인지 설명하면서 우리의 행정 서비스를 예로 들었다. 우리나라는 집 근처 어느 관공서를 가도 빠르다는 거다. 관공서를 방문하지 않아도 집에서 인터넷이나 스마트폰으로 가벼운 서류발급 정도는 할 수 있는 우리다.
하지만 해외 행정 서비스는 너무 느렸다. 서류발급도 며칠은 커녕 몇 달이 걸렸다. 누구는 인종차별인가 싶어 현지인들에게 어떻게 해야 하냐고 말했더니, 우리도 그러고 사니 네가 이해하라는 웃픈 이야기도 있었다. 한국에서 살다 돌아가는 외국인들도 ‘빨리빨리’의 나라인 대한민국의 배달 서비스는 너무 부럽다고 하지 않나. 한밤중에 주문해도 새벽이면 찰떡같이 주문한 물건이 배달되는 나라에서 사망에 관한 서류발급은 누워서 껌 아니겠는가. 하루빨리 고인을 한국으로 데려가고 싶다는 마음이 느린 해외 행정에 대한 불만을 부채질했다.
시청에서 서류 발급을 위한 만남이 잡힌 날이다. 시청 문을 열고 들어갔다. 안내 데스크에 앉아 계신 얌전해 보이는 할머니 한 분이 눈에 들어왔다. 나와 유가족의 통역을 도와주던 분이 그 할머니에게 우리를 소개하며 돌아가신 분을 위한 서류발급을 위해 시청을 방문했다고 말했다. 그러자 이야기를 들은 그 안내 할머니는 두 손을 모으더니 자리에서 일어나 우리를 두 팔 발려 안았다. 손을 잡아 주었다. 언어가 달라 말은 통하지 않았지만 눈과 손과 팔로 마음은 통했다. 무슨 말을 하는지 알 것 같았다. ‘저는 당신을 슬픔을 이해합니다.’
곧 담당 공무원을 만났다. 조용한 방으로 우리를 안내한 공무원은 저 멀리 타국에서 온 우리 외국인에게 먼저 애도의 말부터 건넸다. 슬픔에 함께 기도하겠다고, 힘든 마음 알고 있다고. 급할 일 없으니 천천히 말해도 괜찮다고 설명했다. 통역으로 또는 글자를 써가며 서류발급을 위한 일을 진행했다. 공무원은 친절하고 다정하게 우리의 말을 들었다. 나는 서류를 받기 위해 시청을 찾아갔지만 내가 시청에서 받은 건 위로의 애도였다.
죽음은 애도가 필요하다. 우리의 애도는 편리하다. 상조회사에서 제공하는 여러 ‘상품’의 장례 시스템은 편리하다. 사망신고는 간편하다. 하지만 ‘편리의 속도’ 대신 우리는 ‘이별의 따뜻함’은 놓치고 있는지 모르겠다. 상실의 고통, 이별의 슬픔에 빠져있는 이에게 먼저 전해 줄 건 따뜻한 위로이다. 아무리 세상의 모든 것들이 지나간다고 해도 이별의 아픔을 견뎌내는 건 자신의 힘만으로는 힘들다. 비록 힘든 이의 작은 어깨를 토닥이기만 해도 슬픔은 반으로 줄어든다. 사망 서류 작성하러 온 유가족에게 대기 순서 번호표보다 위로의 말을 먼저 건네주면 좋겠다. 그래야 이별이 슬픔이 아니라 아름답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우리의 이별은 속도가 아니다. 우리의 이별은 안아주기이다.
조승현 가톨릭평화방송신문(cpbc)보도주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