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내년 3월 노란봉투법이 시행되면 둘 중에 선택해야 한다. 공장을 해외로 옮기든지, 자동화를 늘리든지. 얼굴 한 번 본 적 없는 하청업체 노조까지 모셔야 한다니 더는 미련 없다.” 얼마 전 만난 중견기업 오너는 비장하게 말했다. 경영이 어렵고 노조 상대하느라 지쳤다고 했다. 기업인 특유의 엄살은 아닌 듯했다. “회사마다 다르겠지만, 자동화가 생각보다 쉽지 않다. 사람 손을 거쳐야 하는 작업이 여전히 많다. 비용도 많이 든다. 해외로 나가는 게 현실적 대안이다.” 이 회사 직원은 1000명이 넘는다. 공장을 해외로 옮기면 대부분의 일자리가 날아간다. 노동자를 보호하겠다고 만든 노란봉투법이 외려 일자리를 빼앗는 셈이다.
노란봉투법으로 파업·소송은 물론
공장 해외 이전과 자동화 늘 것
노동자보호법이 일자리 뺏는 셈
실패한 최저임금 정책 시즌2 우려
협력업체만 3000여 곳인 한국GM도 철수설이 나온다. 헥터 비자레알 사장은 “한국은 노사 갈등으로 리스크가 크다”며 “미국 본사가 한국 사업장을 재평가할 가능성이 있다”고 말했다. 경영이 악화하고 있는데, 노란봉투법은 ‘울고 싶은 데 뺨 때린 격’이 됐다. 한국에서 철수하면 무려 1만1000명 넘게 일자리를 잃는다. 협력업체까지 포함하면 재앙 수준이다. 공장이 있는 부평·창원 지역경제도 직격탄을 맞는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다른 나라 일자리와 공장을 미국으로 빼앗아 오겠다”고 윽박지르는 판국에 우리는 지키기는커녕 해외로 밀어내는 것이다.
처음엔 노란봉투법을 선의로 시작했다. 파업에 연루된 노동자가 가혹한 손해배상 처벌을 받으니 이 부담을 덜어보자는 취지였다. 여기에 하청 노조가 원청업체와 직접 교섭하도록 하는 조항을 넣었다. 지금은 파업 손해배상보다 하청 노조 문제가 더 커졌다. 법 시행도 전에 하청 노조가 원청을 상대로 처우 개선을 요구하는 사례가 잇따른다. 1년 내내 수백, 수천 하청 노조를 상대해야 한다는 재계의 우려가 과장이 아닌 것 같다. 하청 중소업체도 걱정이 태산이다. 자기네 노조가 강성으로 치달으면 원청이 아예 거래를 끊을 수 있기 때문이다.
쟁의 대상에 구조조정·인수합병·사업장 이전 등 경영상 결정을 포함한 것도 문제다. 회사가 망하는데 노조 승인을 받아야 할 판이다. 벌써 파업이 늘어날 조짐이다. 정부는 노란봉투법이 글로벌 스탠더드라는 입장이다. 하지만 독일 등 대다수 유럽 국가는 경영상 결정을 쟁의 대상으로 하지 않는다. 법안에 ‘실질적 지배’ ‘근로자에게 영향을 미치는’ 같은 추상적 문구가 많아 논란을 부추긴다. 정부 지침이 명확지 않은 데다 판례도 충분치 않다. 결국 건건이 소송을 통해 법원의 판단을 받아야 한다. 대법원 판결까지 수년 걸리고, 사안마다 판단이 다를 수 있어 혼란이 불가피하다. 이래저래 로펌만 신났다.
노동자가 승리했다고 자축할 일이 아니다. 일자리가 없어지면 다 부질없는 일이다. 노란봉투법 시행으로 사람 대신 로봇을 많이 배치할 것이라는 예상으로 로봇 관련 주가가 치솟는 웃지 못할
상황이 벌어졌다. 기존 일자리도 위태로운 마당에 새 일자리 창출은 언감생심이다. 7월 현재 일도, 구직도 하지 않고 ‘쉬는 20대’가 42만 명으로 최고치를 기록했다. 일할 의지가 없는 게 아니라 양질의 일자리가 충분치 않기 때문이다.
오랜 기간 온갖 사연이 복잡하게 얽혀 지금의 세상 질서가 만들어졌다. 한쪽 측면만 보고 덜컥 정책을 밀어붙였다가는 심각한 후유증을 낳는다. 문재인 정부 최저임금 인상이 그랬다. ‘불쌍한 저임금 노동자를 위해 최저임금을 올리겠다는데 뭐가 문제냐’는 식으로 쉽게 생각했다. 진영 논리에 갇힌 1차원 사고다. 착한 일이라고 시작했지만, 저임금 노동자를 고용하는 영세 자영업자를 사지로 몰아넣었다. 정부가 차려 놓은 링 위에서 취약계층인 알바와 영세업자 간 벼랑 끝 싸움이 벌어졌다. 문재인 정부와 대기업 귀족 노조가 최저임금을 대폭 올렸다고 생색을 내는 사이 영세업자는 문을 닫았다. 알바는 백수가 됐다.
최저임금 실패의 전철을 밟지 말아야 한다. 정부는 아직 사태의 심각성을 절감하지 못한 것 같다. “노란봉투법으로 기업이 해외로 떠나면 재개정하면 된다”(김용범 정책실장)는 발언은 무책임하다. ‘아니면 말고’ 아닌가. “노조도 국익을 생각할 것”(구윤철 경제부총리)은 물정 모르는 순진한 소리다. 고용노동부는 수많은 하청 노조의 교섭 창구를 단일화하는 절차를 만들겠다고 했다. 이미 법이 통과됐고 시행까지 6개월밖에 안 남았는데, 어느 세월에….
김영훈 고용노동부 장관은 부처의 약칭을 고용부에서 노동부로 변경했다. 구직자보다 기존 노동자를 보호하는 데 초점을 맞추고 있다. 노란봉투법도 그 일환이다. 6개 핵심 과제 가운데 고용 관련은 1개에 불과하다. 노동자에 끼지도 못한 구직자는 여기서도 찬밥이다. 장관이 노조위원장 출신이어서 그런가. 노란봉투법 시행 이후 일자리가 줄어들면 자리를 지키려는 노동자와 사회 주변부로 밀려나는 구직자 간의 기막힌 싸움으로 번질 우려가 있다. ‘알바 대 영세업자’에 이어 ‘을의 전쟁 시즌 2’가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