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북민 정착스토리](32) 얼굴 없는 설치미술가 코이..."탈북 작가 아닌 '아티스트 코이'로 불러주세요"

2025-12-14

[서울=뉴스핌] 이영종 통일전문기자 = 코이 작가의 작업 주제는 신발이다. 누구에게나 신발은 일상의 필수품이자 자신을 표현하는 패션 아이템 중 하나다.

북한 주민들에게 익숙한 '편리화' 50켤레에 담긴 사연들. 설치미술가 코이의 첫 대표작은 '너와 함께 걷는 남향집 가는 길'이라는 작품이다.

그녀는 이 익숙한 신발을 통해 삶과 기억, 존재의 흔적을 풀어낸다. 북한 출신 설치미술가 코이는 지금까지 15회의 전시를 열며 활발히 활동 중이다.

얼굴이 공개되지 않은 탈북민 작가 코이가 예술가로 본격적으로 나선 것은 한국 정착 10년째 되던 2020년이었다. 홍익대학교에서 섬유미술과 패션디자인을 전공한 그녀는 이후 패션 관련 회사에서 일을 시작했다.

일하면서도 그녀는 늘 고민했다. '나의 정체성을 버리지 않고 고향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일까?'라는 것이었다.

그때 탈북민 정착 지원기관인 남북하나재단과 통일부 산하 남북통합문화센터가 주관한 '2020년 통합문화 콘텐츠 창작 공모전'이 열렸다. 그녀는 '이건 나를 위한 무대다'라는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코이 작가는 "나의 정체성, 탈북민들의 이야기를 많은 사람들에게 알리는 것이 내가 해야 할 역할이라고 느꼈어요. 이 기회에 내가 가진 모든 것을 쏟아붓겠다고 다짐했죠."라고 말했다.

편리화에 편지를 담은 작품은 창작 지원 사업에서 큰 반응을 얻으면서 KBS와 MBC 등 여러 언론의 주목을 받았다. 이후 지자체와 기관에서 전시 요청이 이어지며, 작가 코이로서의 입지를 단단히 다져가고 있다.

'오늘을 걷는 이유'라는 작품은 작가의 또 다른 대표작 중 하나다. 북한을 떠난 날부터 한국 하나원에 도착하기까지의 여정을 30켤레의 신발에 시간대별로 새겨 넣었다. 각각의 신발에는 부모님에게 보내는 편지가 담겨 있다. 작품 속 신발들은 단순한 오브제가 아니라, 작가가 지나온 길과 감정을 그대로 품은 기록이다.

한반도의 북쪽에서 태어난 코이 작가는 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약 2년간 패션 관련 공장에서 일했다. 그곳에서 언젠가 '지배인이 되겠다'는 꿈을 품었다.

그러나 부모님은 한곳에 머무르지 말고 여행을 통해 식견을 넓히라고 가르쳤다. 덕분에 그녀는 기회가 될 때마다 평양이나 다른 지역을 다니며 세상을 직접 경험했다.

고향에서는 나름 잘나간다고 생각했지만, 그제야 자신이 우물 안 개구리였음을 깨달았다. 또한 한국 드라마와 영화를 많이 접하며 한국에 대해 알게 되면서 새로운 세계에 대한 호기심도 생겼다.

반복되는 일상 속에서 '다른 삶을 살아보고 싶다'는 마음이 커지자, 결국 그녀는 탈북을 결심했다.

2009년, 19살의 나이로 한국에 도착한 코이 작가는 가족을 데려오기 위해 누구보다 노력했다. 그러나 그녀의 간절한 바람은 끝내 이루어지지 못했다.

수없이 시도하고 방법을 찾아 헤매며 버텼지만, 결국 그녀에게 전해진 것은 가족에게 닥친 상상도 못 할 만큼 아픈 소식이었다.

아버지와 오빠는 세상을 떠났고, 어머니는 생사조차 확인할 수 없다는 사실이었다. 그 순간, 세상이 멈춘 듯했다. 가족을 다시 만날 수 있을 거라는 희망으로 하루하루를 견뎠던 지난 시간이 무너져 내렸다.

무엇보다 마지막까지 가족 곁을 지켜드리지 못했다는 죄책감이 그녀를 짓눌렀다. 그 절망의 밑바닥에서 코이는 인간의 삶과 죽음에 대해 깊이 고민하기 시작했다. '삶이란 무엇이며, 죽음은 어디로 향하는가'라는 생각이었다.

수많은 질문 끝에 그녀는 한 가지 결론에 다다랐다. 이제는 내가 그들의 몫까지 살아내야 한다. 그렇게 다시 마음을 다잡은 그녀는 가족의 부재를 품은 아픔을 예술로 옮기며 자신의 삶을 새롭게 써 내려가기 시작했다.

직접 전할 수 없었던 탈북의 이야기는 결국 신발 속 편지로 남겨졌다. 이 작품은 작가 본인이 겪은 고독한 여정과 상실의 아픔을 보여주면서도, 결국 '내가 더 잘 살아내야 한다'는 희망과 강인한 의지를 대중에게 전하는 매개가 되고 있다.

코이 작가는 예술 활동을 통해 우리 사회에 가장 중요한 메시지를 전한다. 바로 북한이탈주민은 특별한 사람이 아니라 우리 이웃이라는 인식의 전환이다.

그녀는 북한에 이미 관심 있는 사람들에게 이야기하는 것보다, 무심히 지나치는 사람들의 시선을 머물게 하는 것이 자신의 미션이라고 강조한다.

공연이나 글보다 미술을 선택한 이유도, 미술은 길을 지나가는 누구나 편하게 들러 함께 향유할 수 있는 가장 자연스러운 방식이기 때문이다.

그녀의 작품이 공공기관과 지자체로부터 꾸준히 전시 요청을 받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정치적 메시지보다는 따뜻한 스토리텔링과 공감을 중심으로 관람객과 소통하기 때문이다. 작가로 활동하며 전시마다 보람을 느끼지만, 가장 기억에 남는 순간은 최근 인천에서 열린 전시회였다.

"하나원을 나온 지 얼마 안 된 분이 제 작품을 보러 오셨어요. 그분이 제가 지난 10년 동안 정착해온 이야기를 듣고 '나도 할 수 있겠다, 희망이 생겼다'고 전해 주셨을 때 정말 눈물 나게 감동적이었죠. 작품이 우리 고향분들에게 용기를 주고, 나아가 우리 사회에 대한 긍정적인 기대감을 줄 수 있다는 사실이 제게 가장 큰 울림이었어요."라고 코이 작가는 말한다.

작가의 앞으로의 목표는 분명하다. 현재는 '탈북민 작가'라는 타이틀로 불리지만, 궁극적으로는 이 타이틀을 넘어 '아티스트 코이' 자체로 작품성을 인정받고 싶다고 한다.

yjlee@newspi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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