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클래식 피아노의 지평이 달라지고 있다. 콩쿠르를 지배해 온 미국·독일제 스타인웨이의 기세가 꺾이고, 보급형으로 취급받던 일본제 피아노가 그 자리를 대체하는 모습이다.
지난 21일(현지시간) 막을 내린 쇼팽 피아노 콩쿠르에서도 이런 추세가 뚜렷해졌다. 쇼팽 콩쿠르에선 참가자들이 직접 자신이 연주할 피아노를 선택한다. 전 세계에 생중계되는 연주 영상에는 연주자의 이름, 국적과 함께 연주하는 피아노 상표를 표기한다. 피아노 제조업체로선 여기에 이름이 오른다는 것 만으로도 세계 최정상급 연주자들로부터 기술력을 입증받는 셈이다. 홍보 효과는 덤이다.
스타인웨이의 독주는 2010년 쇼팽 콩쿠르 우승자 율리아나 아브제예바가 야마하 피아노를 선택하며 흔들리기 시작했다. 2015년 조성진이 다시 스타인웨이로 정점에 올랐지만, 코로나로 1년 늦춰진 2021년 우승자 브루스 리우의 선택은 이탈리아의 파지올리였다. 파지올리는 1981년 설립된 비교적 젊은 브랜드다. 당시 “이번 콩쿠르는 파지올리의 우승”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화제가 됐다.
“대담한 지속력, 역동적 대비 만들어”

올해 대회의 진정한 우승자는 일본 가와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결선 진출자 8명 중 3명이 가와이를 선택해 파지올리와 동률을 이뤘다. 중국의 왕쯔통과 표트르 알렉세비츠(폴란드)·빈센트 옹(말레이시아)이 가와이 피아노로 각각 3위와 공동 5위에 올라섰다. 여전히 전체 참가자 84명 중 절반이 넘는 43명이 스타인웨이를 선택했지만, 지난 대회 75%에서 크게 줄어들었다. 반면 가와이(22명)와 파지올리(10명)를 택한 연주자는 늘었다. 야마하(7명), C.베히슈타인(2명)이 뒤를 이었다.
가와이 피아노는 ‘숲속의 피아노’로도 불린다. 시즈오카현 하마마츠의 숲속 작업장에서 일본 장인들이 수작업으로 피아노를 만든다. 이렇게 만들어진 피아노는 무겁고 깊은 음색을 낸다. 가와이가 이번 콩쿠르에 협찬한 피아노는 최상급 브랜드 시게루 가와이의 ‘SK-EX 풀콘서트 그랜드 피아노’다. 핵심 부품인 액션에 신소재를 적용해 연타에도 높은 반응과 안정된 터치감을 제공하는 것이 특징이다. 세계적 권위의 영국 클래식 전문 잡지 그라모폰은 옹의 연주에 대해 “첫날 네 명의 ‘폴로네즈 판타지’ 중에 가장 역동적인 대비를 보여줬다. 시게루가와이의 대담한 지속력이 도움됐다“고 평했다.

원래 가와이의 주력은 고급 그랜드 피아노가 아니었다. 가와이는 야마하 창립 멤버이기도 한 가와이 코이치 초대 회장이 1927년 설립했다. 저렴한 가격의 보급형 모델을 내세워 점유율을 늘려왔다. 야마하에 이어 세계에서 두 번째로 많은 판매량을 기록했다.
하지만 최근 세계적으로 피아노 판매가 감소하며 가와이는 창립 이래 최대 위기를 맞았다. 일본 니혼게이자이신문(닛케이)에 따르면 올해 3월 가와이의 자기자본이익률(ROE)은 0.9%에 그쳤다. 닛케이는 “가와이의 내년 신중기 경영계획을 보면 고급화 전략을 꾀하고 있다”며 “제품 부가가치를 높이고 시장 점유율을 확대하는 데 국제 콩쿠르의 무대가 더욱 중요해진다”고 전했다.
콩쿠르 경쟁 치열…“세계 최고 목표”

기술력이 좋다고 반드시 흥행하는 건 아니다. 무대 뒤엔 피아노 회사들의 치열한 경쟁이 숨어 있다. 피아노 업체들은 최고급 피아노를 무료 제공하는 것은 물론 모든 부대 비용도 부담해야 한다. 가와이도 이번 대회에 앞서 만반의 준비를 했다. 2년 전 콩쿠르 장소 도보 거리에 매장을 열고 자체 콘서트홀과 연습실을 제공했다. 연주자들이 대회 전부터 가와이 피아노와 친해질 기회를 마련한 것이다.
가와이의 다음 목표는 우승자의 선택을 받는 것. 역대 최고 성적은 지난 대회에서 '시게루가와이 SK-EX 풀콘서트'로 공동 2위에 오른 알렉산더 가지예프(이탈리아, 슬로베니아)다. 올해 우승자인 에릭 루(27)는 파지올리를 골랐다. 콩쿠르가 열린 바르샤바 국립필하모닉홀의 환경을 고려한 선택이었다고 한다. 그는 중앙일보와의 인터뷰에서 “연주할 때 홀의 음향이 많이 울리더라. 그래서 이번에 (소리가 선명한) 파지올리 피아노를 선택했다”고 말했다.
4대째 가업을 이어오고 있는 가와이 켄타로 대표는 “(콩쿠르는) 피아노 제작사들의 승부의 장소”라며 “클래식 피아노의 세계에서 최고가 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고 밝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