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터리] 지멘스가 만드는 미래 동네

2025-12-14

독일 베를린의 ‘지멘스슈타트(Siemensstadt)’는 산업 유산이 모여 있는 독특한 동네이자 기업이 직접 도시를 만든 세계적인 실험의 현장이었다. 19세기 말 전기 회사 지멘스는 전기라는 새로운 기술은 설명이 아니라 생활 속 경험을 통해 비로소 시민에게 받아들여진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기술의 가치를 증명하기 위해 지멘스는 하나의 동네, 지멘스슈타트를 만들었다. 1370세대, 약 4000명이 모여 살던 이 동네에서 전기의 시대가 열렸다. 사람들은 가전제품으로 하루를 시작했고 전차로 출근했으며 전력 시스템과 엘리베이터가 갖춰진 건물에서 일했다. 밤이면 전기 가로등이 밝힌 거리에서 새로운 도시 문화를 누렸다. 생활 곳곳이 지멘스 기술로 작동하는 이 실험 동네는 기업에 대한 신뢰를 높였고 지멘스가 세계적 기업으로 도약하는 발판이 됐다.

이 작은 동네가 독일 산업의 흐름까지 바꿔놓았다. 산업혁명에 뒤처졌던 독일은 이를 통해 전기 산업의 경쟁력을 키워냈고 1913년에는 세계 전기 시장의 절반을 차지하는 전기 강국으로 성장했다. 이 과정에서 베를린은 전기 산업의 중심 도시로 자리 잡았다. 지멘스슈타트는 동네라는 생활공간이 신기술을 검증하고 확산시키는 혁신 플랫폼이 될 수 있음을 증명하며 오늘날 혁신 클러스터와 스마트도시의 원형이 됐다.

100년이 지난 지금 ‘인더스트리 4.0’을 선도하는 지멘스는 미래 동네 ‘지멘스슈타트 2.0’을 추진하고 있다. 디지털과 에너지 전환, 그리고 인공지능(AI) 시대를 대비해 45억 유로를 투입하는 전략 사업이다. 대기업과 스타트업·대학이 한 공간에서 협력하는 개방적 혁신 생태계를 구축하고 에너지와 도시 운영을 실시간으로 최적화하는 탄소 중립형 미래 동네를 계획하고 있다. 지멘스는 제품을 넘어 미래 삶의 방식을 제시하는 기업으로 다시 도약하고 있다.

테크 기업들이 동네를 만들기 시작한 이유도 같다. 도요타 우븐시티, 구글 빌리지, 애플 파크는 모두 기술의 가치는 제품만이 아니라 사람들의 생활 속 경험을 통해 결정된다는 사실에 주목했다. 그래서 이들 기업은 기술이 삶에 스며드는 과정을 함께 체험할 수 있도록 미래 동네를 조성하고 있다. 일상에서 사람들이 선택한 기술을 먼저 구현한 기업이 새로운 시장의 주도권을 갖는다는 점을 정확히 알고 있다.

이제 도시는 건설 회사만이 아니라 첨단 테크 기업도 함께 만들어가는 시대다. 우리나라 역시 같은 질문 앞에 서 있다. 모빌리티의 현대자동차, 디바이스의 삼성전자, 플랫폼의 네이버와 카카오 등 세계적 기술력을 갖춘 기업들이 있지만 사람들이 첨단기술과 뛰어난 제품을 직접 체험하고 검증할 수 있는 미래 동네는 아직 없다. 생활 기반의 실험 공간이 없다면 기술은 시장을 넓히지 못하고 산업은 성장 속도를 잃는다. 결국 미래산업의 주도권도 가져가기 어려워진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더 많은 신도시가 아니다. 작고 빠르게 실험하고 확장할 수 있는 동네 혁신 모델이다. 이는 우리나라가 가장 잘할 수 있는 분야이기도 하다. 이 혁신을 완성하려면 기업은 기술을 생활로 연결하는 테크 기업으로, 정부는 제도와 규제를 유연하게 재설계하는 파트너로 나서야 한다. 지멘스가 100년 전에 만들었고 지금 다시 만들고 있는 동네의 교훈은 명확하다. 작은 동네가 혁신의 무대가 될 때 기술은 삶 속에서 검증되고 그 경험이 기업과 국가의 미래를 결정한다. 이제는 우리가 미래 동네를 지을 차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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