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문하는 미래

2025-09-01

미국에서 한 10대 소년의 부모가 오픈AI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했다. 16세인 아들이 인공지능(AI) 챗봇에게 스스로 생을 마감하는 방법에 관해 물었고, 챗봇이 알려준 방법으로 결국 죽음을 맞이했기 때문이다. 일본에서는 AI를 배우자 삼아 오프라인에서 결혼식을 거행했다는 소식도 들려왔다.

AI를 미래의 먹거리라 일컫지만, 이미 우리 생활에 깊숙이 들어왔음을 부정하기 어렵다. 정부 보고서에 따르면, 한국인 세 명 중 한 명이 생성형 AI를 경험해봤다고 응답했다. 1년 전보다 2배 가까이 증가한 수치다. 20대를 대상으로 한 어느 설문조사에서 응답자의 73%가 사람이 아닌 AI에게만 고민을 털어놓은 경험이 있다는 결과도 보았다. 요컨대 우리는 백과사전이자 친구이자 상담사를 겸하는 무엇을 대면하고 있다.

장강명 작가가 쓴 <먼저 온 미래>는 2016년 알파고와 이세돌의 대국 이후 바둑의 세계에서 벌어진 일을 살피며, AI가 바둑계를 뛰어넘어 문학과 인간의 삶에서 새롭게 펼칠 일들을 고민한다. AI는 지금까지 인간이 가치 있다고 생각해온 일에 의문을 제기하고, 방향을 바꾸어버리며, 가치를 떨어트리기도 한다. AI는 인간이 가치로부터 소외되도록 한다는 그의 글에 나는 무척 동의한다.

올더스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가 출간된 지 100년이 되어간다. 그 속에서 미래 인간 세계의 모습은 아쉽게도 디스토피아다. 끔찍하지만 AI에 제압당하는 인간의 모습은 그 이후 수많은 창작품에서 다뤄졌다. 거의 모든 분야에 AI를 사용하는 지금, AI를 쓸 것인가 말 것인가 하는 문제는 논의할 가치가 없어졌다. 스마트폰을 사용하지 않던 시절로 돌아가자고 제안할 수는 없는 일이니까, 지금이라도 멈출 수 있지 않으냐는 말은 이제 의미가 없다. 범용인공지능(AGI)이 거의 모든 분야에서 인간보다 우위에 서는 순간이 온다면, 인간은 일과 삶에 어떤 의미를 부여해야 할까.

인간은 이런 시대를 어떻게 살 것인가. 인류 진보의 뿌리는 추구와 갈망에 있다. 경제적 불평등과 급격한 기후변화 같은 부작용을 내었지만, 인간은 끊임없이 새로운 가치를 추구하고 그것에 동력을 받아 진보했다. 즉 끊임없는 사유가 질 좋은 추구를 만들어냈다. 사람이 던지는 질문의 질이 챗봇이 하는 답의 질을 결정하는 것과 같은 이치다. 나는 작가가 하는 일의 절반 정도는 좋은 질문을 만드는 거라고 생각한다. 좋은 질문이 좋은 작품을 끌어낸다.

<먼저 온 미래>로 돌아가서, 책에서는 AI가 바둑의 판도를 바꿨듯, 예술적 영역인 창작품도 얼마든지 만들 수 있지 않겠냐고 말한다. 베스트셀러 소설을 모아 학습시키고 새로운 작품을 만들라고 하면 AI는 그럴듯한 글을 만들어놓을 것이다. 이것이 창작이냐 하는 문제는 차치하더라도 이런 글에서는 익숙함을 떨쳐내기 어렵다. AI가 소설의 형식을 갖춘 글을 만들어낼 수는 있겠지만, 그 이상은 해낼 수 없다는 거다. 독자는 사유한다. 고만고만한 방향성을 지닌 창작품을 날카롭게 걸러낸다. 양산형 콘텐츠에서조차 새로움을 요구한다. 그러니 AI가 만들어내는 작품을 정성스럽게 소비하지 않을 것이다.

한 사람의 작가는 선배 작가들을 읽으며 스타일을 배우고 익히지만, 결국에는 자신의 색깔을 갖추며 진짜 작가로 거듭난다고 배웠다. 선배들이 던진 질문을 읽고 답하며, 내가 보고 듣고 느낀 것을 토대로 본연의 새로운 질문을 만들 때 진짜 좋은 작가로 거듭날 수 있다고 했다. 문학계에서 통용되는 이 방법은 시대적 고민의 해답이 될 것이다. 학습한 데이터에서 확률적으로 가장 그럴듯해 보이는 결과를 내놓는 AI가 새로운 가치를 만드는 일까지 대신하기는 어렵다. AI가 무조건 디스토피아를 불러올 거라고 단정할 수는 없다. 하지만 인간이 더 이상 깊이 사유하지 않는 사회라면 정신적 디스토피아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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