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서현 기자 sunshine@kyeongg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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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권 ‘이니셔티브’ ‘리쇼어링’ 등… 유권자 “보이지 않는 벽”

외국어를 남용하는 언어 현상이 스타트 업계를 넘어 정치권까지 확산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31일 IT 업계에 따르면 최근 몇 년간 판교 스타업계를 중심으로 영단어와 한국어를 섞은 이른바 판교 사투리 또는 판교어가 퍼졌다.
‘레슨런(Lesson-Learn·교훈)’, ‘리텐션(Retention·고객 유지율)’ 등 업계 종사자가 아니면 바로 알아듣기 힘든 영단어들을 일상적으로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세태를 반영한 노래까지 나왔다. “이슈 해결 완료, 바로 머지해. 너에 대한 마음은 얼라인드”란 가사를 담은 ‘판교 스타트업 아이돌’(노래 꼬마숙녀)이란 유튜브 영상은 44만회 이상 조회수를 기록했다.
하지만 일반인, 취업준비생들은 판교어가 어렵다는 반응이다. 용어를 배우려는 사람을 위한 정리본이 거래되고 지난해 9월엔 ‘판교어 번역기’라는 검색 서비스도 생겼다. 모르는 단어를 쉬운 말로 풀이해주는 용도다.
이러한 외국어 혼용은 대선 공약에서도 나타났다. 유권자들은 정책보다 단어 뜻을 먼저 이해해야 하는 상황에 놓였다.
중앙선거관리위원회의 정책·공약마당 속 제21대 대통령선거 후보자공약을 보면 더불어민주당 이재명 대선 후보는 ‘K-이니셔티브·글로벌 소프트파워 빅5 문화강국’이란 용어를 사용했다.
국민의힘 김문수 대선 후보는 ‘5개 메가시티 조성 및 메가프리존·화이트존·농촌프리존 도입’을 제시했다. 개혁신당 이준석 대선 후보도 ‘디텐션 제도로 공부하는 교실’을, 민주노동당 권영국 대선 후보는 ‘전국 5개 핵심 클러스터 지정’을 공약으로 냈다.
일부 유권자에게는 이러한 외국어 표현이 공약을 이해하는 데 걸림돌처럼 느껴졌다.
용인에서 근무하는 직장인 김모씨(31)는 “모르는 단어가 나오면 흥미가 떨어져 그냥 넘긴다”고 말했고, 수원시민 신모씨(58)는 “정확한 의미를 알기 어려워 두루뭉술하게 이해하게 된다”고 전했다.
신광영 중앙대 사회학과 교수는 “새로운 용어의 등장은 불가피하지만 적절한 번역어가 있음에도 쓰지 않으면 보이지 않는 벽을 만들어 전문성이나 권위를 내세우는 경향을 만들 수 있다”며 “같은 집단 내에서는 효율적일 수 있지만, 다른 집단과는 비효율적인 소통이 될 것”이라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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