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여름 폭염 속에서 매일 아침 40분씩 달렸다. 쓸모없다는 느낌과 곧 있으면 닥칠 낮의 무력감을 떨쳐내기 위해서였다. 비 오기 전 무겁게 누르는 습기처럼, 인공지능(AI) 시대에 인간의 값은 한없이 하락하는 반면, 불안은 상승한다.
지난 몇 달간 번역기로 중국어, 영어, 프랑스어권 책들을 검토하는 게 일과였다. 우리 출판사는 외서 출간 비중이 높아 종종 번역가에게 외서 검토를 맡겼고, 의견과 샘플 번역을 받기까지는 보름에서 한 달 걸렸다. 기다림은 책 만드는 사람에게 초조함보다는 기대감을 불러일으킨다. 템포는 삶을 드라마로 만드는 데 중요한 요소다. 무언가를 당겼다가 늦췄다 하는 리듬을 타면 인간은 현재를 과거로 넘기는 데 애석함이 별로 없고, 어제의 경험으로 얻은 암묵지(暗默知)를 통해 미래를 어제처럼 반길 수 있다. 2차대전 종전 후 유럽인들이 잿더미에 주저앉아 넋 놓기보다 1945년을 ‘0년’이라 부르며 재건의 의지를 다졌던 건 벽돌 쌓고 시멘트 바르던 토대 구축의 감각이 몸에 새겨져 있었기 때문이다. 지금은 시간을 그런 식으로 쓰려는 마음이 쉽게 먹어지지 않는다. AI가 매일 집적에 대한 배신을 환기시키기 때문이다.
AI, 출판계에도 큰 변화 가져와
적, 인내, 개성 경시될 수도
AI가 못하는 정신의 영역 있어

AI가 출판 영역에 가져온 근본적인 감정은 토대에 대한 폄하다. 첫째, 번역은 오랜 수련을 요구해 초보 번역가에게서 더 나은 결과물을 받으려면 여러 해 그와 소통하며 실력이 향상되길 기다려야 하는데, 그런 기본기 다지기에 투자할 의욕이 줄어든다. 둘째, 신입 편집자를 키우려면 최소 3년의 시간은 들여야 하는데, 교정 교열을 가르치며 문장력이 나아지길 기다리는 과정이 비효율적으로 느껴진다. 셋째, 글쓰기는 구조와 문체가 핵심인데, 그 과정에서 기계의 힘을 빌린다면 저자를 어디까지 존경할 수 있을지 가늠이 되지 않는다. 글쓰기는 글쓴이 삶의 총합이라 여겨지곤 했지만, 이제는 그렇게 보기 어려워졌다.
인간이 자신감을 가질 수 있었던 건 대부분 시간 때문이었다. 축적과 연대기는 평범한 사람이 압도적 승리감을 느끼도록 하는 강력한 무기였다. 하지만 번역기를 통해 외서 검토를 하루 만에 끝내고 그 루틴을 반복하다 보니 나는 ‘연마’라는 단어에 시들해졌다. 게다가 편집자는 번역기가 한 일을 가지고 출간 여부를 결정하는 자신을 관리자로밖에 여길 수 없다.
관리자는 뼛속 깊이 계산적이다. 관리자에게 미래는 비용 절감의 세계이고, 이런 세계에서 나도 타깃이 될 수 있다. 단정적 예측을 내리지 않으려면 미래를 내다봄과 동시에 과거를 돌아봐야 한다. 그러면 장기적인 관점을 통해 현재의 불안정성을 맥락화할 수 있기 때문이다. 에릭 슈밋 등이 『새로운 질서』에서 AI 이야기를 하면서도 자꾸만 문명의 시작점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이유도 불안을 맥락화해 그 속에서 ‘적응’하도록 북돋기 위함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무엇을 이뤄내는 것과 무언가에 적응하는 것, 이 둘의 간극은 크다. 로베르트 발저의 소설 『토볼트 이야기』를 보면 내가 먼저 다가가지 않고 나를 향해 다가오는 무언가를 기다리는 사람은 심각한 태만죄를 가진 것으로 그려지는데, 지금 많은 사람은 그런 방식으로 미래를 맞이하고 있다.
사실 미래를 맞는다는 개념은 구시대적이다. 미래가 우리 앞으로 질주해오고 있기 때문이다. 많은 직업인은 자신이 여전히 창의적인 일을 하고 있다고 말하지만, 가령 책 전체 공정을 맡는 나는 늘 하인처럼 세심한 주의를 기울일 것을 요구받는다. AI는 신속하고, 꽤 정확하고, 조용하다. 반면 편집자는 느리고, 종종 부정확하고, 소란스럽다. 예전에는 원고를 읽으면 거기 담긴 정신이 체제와 주류에 맞서도록 나를 보호해주리란 기대가 있었지만, 지금은 여러 과정이 기계와 함께 이뤄지다 보니 내가 하는 일이 나를 보호해줄 것 같지 않다.
나는 요즘 AI 시대를 걱정하면서도 벤야민, 발저, 플로베르를 읽고 있다. 과거의 책 중 상당수는 여전히 미래의 책이기도 하며, 나는 이 책들이 좀 더 영속성을 지니길 바란다. 가령 발저의 글에는 수줍음이 있다. ‘나’와 ‘내 글’은 아무 내용도 없다는 수줍음이다. 발저는 그렇게 오로지 글쓰기에만 자신을 소진시킨 뒤 죽은, 탁월한 삶을 산 존재다. 그의 소설은 아무 내용이 없지만, 그 빛나는 형식은 살아남아 내가 바로 문학이라고 말한다. 그러니 인간이 할 일 중 하나는 ‘정신이 지능으로 왜곡되지 않게 하는 것’이리라. 하이데거는 1930년대에 미국과 러시아라는 양 강대국이 출현했을 때 인간의 정신이 관찰, 계산, 연구에 필요한 이해력으로 변조되는 것을 우려하며 정신과 지능을 구분했다. 여러 작가들 또한 ‘글쓰기는 오로지 스스로를 계발하는 일’이라고 강조해왔다. 그 자기계발을 저자, 역자, 편집자 모두 AI에 얼마간 넘길 각오를 하고 있지만 본인의 정신이 양보 안 할 부분은 어디일지, 그리고 오로지 나만이 가능한 밥벌이라고 주장할 수 있을지는 개인마다 차이가 날 것이다.
이은혜 글항아리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