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랑에 순서가 있다는 말은 형용모순이다. 사랑은 저절로 싹틀뿐더러, 통제하기도 어렵다. 사랑이 순서대로 착착 이뤄지는 것이라면, 세상의 수많은 사랑 이야기는 만들어지지 못했을 것이다.
물론 사랑이 싹트는 데 순서가 있을 수 있다. 가까운 사람, 오랜 시간 함께한 사람, 취향이나 신념이 비슷한 사람…. 심리적·물리적 거리가 가까운 이일수록 사랑이 싹트기 쉬울 것이다. 하지만 종교는 이런 협소한 사랑의 개념을 타파하고자 한다. 나와 멀고 가깝고를 떠난 보편적인 인류애를, 나아가 이 지구상 생명·비생명 모두에게로 사랑을 확장하고자 하는 것이 종교적인 사랑이다.
J D 밴스 미국 부통령은 이를 오해했다. 밴스는 성 토마스 아퀴나스의 ‘사랑의 순서’(ordo amoris)를 언급하며 트럼프 대통령의 ‘미국 우선주의’를 가톨릭 신앙으로 합리화하려고 했다. “가족을 사랑하고, 그다음 이웃을 사랑하고, 그다음 나라를 사랑하라”며 가장 마지막에 ‘나’와 관계없는 세계의 이익을 고려해야 한다고 말했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신앙에 대한 오독과 모욕을 참지 않았다. 그는 밴스의 오류를 지적하며 “예외 없이 모든 사람에게 열려 있는 사랑”을 강조했다.
프란치스코 교황의 마지막 메시지도 세상 모든 이들을 향한 경계 없는 사랑이었다. 마지막 부활절 미사에서 그는 전쟁 중인 우크라이나와 가자지구 외에도 레바논·시리아·예멘·민주콩고·수단·남수단 등 분쟁으로 고통 겪고 있는 이들과 미얀마 강진 피해자들을 언급하며 평화를 호소했다. 세상의 모든 고통에 감응하듯 평화를 호소한 프란치스코 교황의 메시지는 ‘순서 없는’ 사랑의 목소리 바로 그것이었다.

레오 14세 교황이 새로운 교황으로 선출됐다. 2000년 가톨릭 역사상 최초의 미국 출신 교황이 탄생하는 이변이었다. 트럼프가 세계를 제멋대로 휘젓는 가운데 교황마저 미국인이어야 하는가에 대한 의문은 잠시, 그의 삶과 목소리는 콘클라베 결과를 수긍하게 했다.
페루에서 20년간 선교사로 활동하며 빈자들을 위해 사목한 그는 페루 국적을 지닌 탓에 “가장 미국적이지 않은 미국인”이란 평을 받기도 했다.
한편으로 레오 14세 교황은 ‘가장 미국적’인 교황이다. 교황 선출 직후 그의 ‘혈통’이 화제가 됐는데, 인구조사 기록에서 교황의 외조부모가 흑인 혼혈을 뜻하는 ‘물라토’나 ‘흑인’으로 돼 있다는 것이다. “인종과 이민의 험난한 역사가 새 교황을 그의 조국과 연결한다”(가디언)는 평이 나왔다. 미국 이민자들의 역사를 간직한 ‘가장 미국적인 교황’인 레오 14세 교황은 “나도 이민자의 후손이자 직접 이민을 선택한 사람”이라며 모든 이의 존엄성을 보장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레오 14세 교황의 첫 목소리는 프란치스코 교황의 마지막 목소리를 이어받았다. 그는 선출 직후, 첫 부활 삼종기도, 즉위 미사에서 일관되게 우크라이나·가자지구 등 세계 각지에서 벌어지는 전쟁을 끝내야 한다며 평화를 호소했다. 그는 증오·폭력·편견이 빚은 상처를 사랑으로 회복해야 한다며 “지금은 사랑을 위한 때”라고 말했다. 순서와 경계 없이 확장되는 ‘사랑의 목소리’다.
좁디좁은 ‘사랑의 순서’를 만들어 경계선 밖의 이들을 적대적으로 대하는 세계에서, 특히 ‘사랑’이란 개념조차 모른 채 오로지 ‘이익’만을 추구하는 트럼프의 시대에 더욱 절실한 목소리다. 가장 미국적이지 않으면서, 동시에 가장 미국적인 교황이 트럼프에게 맞설 ‘신의 한 수’가 될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