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석 자리 ‘소장 전두환’, 20일 뒤 ‘파워맨’으로···쿠데타 뒤 ‘실권 장악’ 재확인

2025-04-29

“12·12 이후 ‘파워맨’, 5·18발포 최고 책임자” 지목

차영귀 서강학국학센터 연구원 5·18 심포지엄 발표

1979년 11월24일 열린 전군 주요지휘관회의에 당시 전두환 보안사령관도 참석했다. 그는 회의에 참석한 주요 지휘관 67명 중 한 명이었다. 소장이었던 전씨의 기념사진 자리는 셋째 줄 왼쪽 아래였다.

20일 뒤인 12월14일 전씨의 위상은 완전히 달라졌다. 글라이스틴 주한미국대사를 만나러 갔던 그는 40명의 무장 계엄군과 경호원을 대동하고 있었다.

전직 대통령 전두환씨가 12·12군사반란 이후 군 서열과 의전을 뛰어넘는 ‘파워맨’ 으로 활동했다는 연구 결과가 나왔다. 5·18민주화운동 당시 계엄군 집단 발포와 민간인 학살을 부인한 그가 당시 군내 최고 책임자였다는 사실이 다시금 입증된 것이다.

29일 차영귀 서강국제한국학선도센터 민주주의연구실 책임연구원이 30일 열리는 5·18 45주년 학술심포지엄에서 발표하는 ‘5·18전사(前史):사전집권음모의 실체적 접근’ 보고서를 보면 전두환은 12·12를 통해 정승화 총장 체제를 제거하고 본격적인 군 장악에 나섰다.

1979년 3월 박정희 대통령에 의해 보안사령관에 발탁된 전씨는 경호실과 중앙정보부에 기세에 밀려 숨죽였다. 10·26으로 박 대통령이 사망하고 당시 권권이 정승화 계엄사령관에서 집중되자 불안해 하기도 했다. 정 사령관 등은 시국이 안정돼 가자 11월21일 ‘계엄 해제’를 논의하고 있었다.

그러나 전씨 등 신군부는 계엄 해제를 원하지 않았다. 그들은 계엄을 통해 집권 계획을 실행하려 했다. 박 대통령 사망이후 합동수사본부가 설치되고 본부장을 겸임한 전씨는 12·12군사반란으로 정 총장을 제거했다.

이후 군내 편제는 완전히 무너졌다. 합수부나 보안사는 계엄사의 지휘를 받아야 했지만 오히려 반대였다. 보안사는 ‘정보처’를 부활 시켜 민간 부분까지 정보 수집활동 범위를 넓혔다.

12·12이후, 전씨는 단 한 번도 전군 지휘관회의에 참석하지 않았다. 군 서열과 의전상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대신 그는 대통령이 주재하는 만찬이나 군 고위층 골프 모임 등 최상급 행사에만 모습을 드러냈다.

전씨에 대한 서열 파괴는 경호에서도 나타났다. 1979년 12월17일 새로 취임한 이희성 계엄사령관은 “606특전대를 합수부에 배속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1978년 창설된 이 부대는 대통령경호실에 배속돼 국내 최초 항공기 대테러를 목적으로 비밀리에 운영된 특수부대였다.

1980년 3월 중장으로 승진한 전두환은 신현확 국무총리에게 중앙정보부장 임명을 강요하기 시작했고 4월14일 목적을 달성했다. 중정부장은 대통령이 주재하는 안보 소위에 참여할 수 있는 멤버로 그는 ‘국가지도부’의 일원이 됐다.

차 연구원은 “전씨는 12·12이후 군의 서열과 의전을 뛰어넘었으며 군 기록물과 의전이 이를 증명해 준다”면서 “그를 5·18 집단 발포와 민간인 학살 명령의 최고 책임자로 지목하지 않을 수 없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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