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타워] 현행 건보제도, 지속가능한가

2025-06-11

필수의료 회생·중증질환 혜택 확대 등 과제 산적

국내 의료시스템은 그동안 의료계의 ‘불가능한 삼위일체(Impossible Trinity)’로 여겨졌던 질 높은 의료와 저비용, 높은 접근성을 모두 충족해왔다.

모든 국민이 저렴한 비용으로 언제, 어디서나 질 높은 의료 서비스를 이용할 수 있었던 중심에는 건강보험제도라는 사회 안전망이 있었다.

그러나 2021년 이후 상황이 바뀌었다. ‘응급실 뺑뺑이’나 필수의료 붕괴, 의대 증원 갈등으로 한국 의료계가 수년째 공회전하면서 건강보험 제도에 대한 ‘재정비’가 시급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건보제도 재정비의 방향성을 위한 논의의 장에서 오갈 만한 세 개의 숫자(금액)에 대해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첫 번째는 20억원이다. 현재 건강보험 급여가 적용되는 약제 중 가장 비싼 약인, 척수성 근위축증(SMA)을 치료하는 유전자 치료제 ‘졸겐스마(Zolgensma)’ 얘기다. 일반 국민 수천 명의 건강검진비용과 맞먹는, 엄청나게 비싼 약이지만 고비용 탓에 SMA 치료를 받지 못할 경우 운동 기능 상실과 저체중, 조기 사망으로 이어질 수 있다. ‘생명을 살리는 금액’이다. 이외에도 킴리아(3억6000만원), 스핀라자(1억원) 등 초고가 신약들이 즐비하다.

두 번째는 5000원, 가벼운 감기로 병원에 가면 청구되는 금액이다. 금액은 초진·재진·처방일 등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감기에 처방되는 약물은 치료제가 아니라 증상완화제다. 여기에 항생제와 소화제까지 5∼6개 알약이 약 봉투에 두둑이 들어간다. 외국의 경우 감기는 대부분 따뜻한 차를 마시며 일주일 정도 쉰다. 그러나 우리나라는 감기로 인한 총진료비가 한 해 1조원이 넘는다. 졸겐스마를 500번 넘게 쓸 수 있는 돈이다.

마지막으로 살펴볼 금액은 60만원이다. 개인적으로 집에서 기르던 햄스터에 생긴 종양을 확인하기 위해 동물병원에 들렀다가 10여분 만에 받은 청구서다. 불과 며칠 전 아이가 폐렴으로 4일간 입원해서 낸 병원비의 2배였다. 개인적인 경험에서 금액을 가져온 이유는 반려동물을 위한 병원비는 병원마다 천차만별이기 때문이다. 인간 환자에겐 경제적인 이유로 치료를 못 받는 상황이 생기지 않도록 치료비와 약값을 정부가 ‘저렴하게’ 묶어놨지만, 동물 치료의 경우 시장논리에 맡겨지다 보니 고가의 치료비가 형성됐다. 2021년 서울아산병원 간호사 사망 사건으로 필수의료 붕괴에 대한 얘기가 한창일 때 의사들 사이에서 “사람을 치료하는 비용이 ‘개값’보다 못하다”고 자조적인 한탄이 나온 이유다. 국내 의료계의 ‘불가능한 삼위일체’는 이렇게 치료비와 약값 ‘후려치기’가 있었기에 가능했지만, 이는 필수의료 기피와 다국적 제약사 신약의 국내시장 기피라는 부작용을 낳았다. 필수 진료과는 60∼80%의 낮은 원가보전율로 인해 진료할수록 손해가 나고 있다.

필수의료를 살리기 위해 원가를 높이게 되면, 한 해 100조원으로 한정된 건보 재정에서 다른 분야에 대한 지원은 끊길 수밖에 없다. 게다가 향후 고령화, 만성질환의 증가, 신약의 고가화 등으로 건보 재정은 더욱 빠르게 고갈될 전망이다. 결국 ‘의대 증원 갈등’ 이전부터 존재했던 중증 질환에 대한 선별적 복지와 보편적 복지 중 우리가 선택해야 하는 방향성에 대한 논의가 필요하다는 얘기다.

어떤 치료에, 누구를 위해, 얼마를 써야 할지에 대한 결정은 단순한 숫자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적 가치의 문제다. 이런 사회적 합의를 위한 ‘숙의(熟議)’의 과정이 이제 필요하다. 숙의를 거치지 않은 ‘의대 증원’이 어떤 결과를 불러왔는지 우리는 이미 지난해 목도한 바 있다.

정진수 문화체육부 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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