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원수도 내일 있기에"…협상만 1500회, 난산 끝 한·일 수교 [창간기획 '대한민국 트리거 60' ⑰]

2025-08-07

대한민국 트리거 60' ⑰ 한·일 수교 60년

6·25전쟁이 한창이던 1951년 10월 20일, 연합군 최고사령부의 중재하에 도쿄에서 한·일 정부 대표단이 처음으로 마주 앉았다. “이제 화해합시다.” 한국 측 수석대표 양유찬이 먼저 말을 건넸다. “도대체 무엇을 화해하자는 겁니까.” 일본 측 수석대표 이구치 사다오의 답은 냉소적이었다.

이날의 풍경은 향후 14년간 이어질 한일회담의 험난한 여정을 예고했다. 2년 후인 1953년 10월 열린 제3차 한일회담 청구권위원회에서도 큰 논쟁이 벌어져 회담은 파행으로 끝났다. 당시 한국 측 홍진기 대표는 “본래 한국은 애국자 투옥과 학살, 기본적 인권의 박탈, 식량의 강제공출, 노동력 착취 등에 대한 보상을 요구할 권리를 갖지만 순수한 청구권만 요구한다”고 했다. 이에 구보다 간이치로 대표는 “그렇다면 일본 측도 보상을 요구할 권리를 갖는다. 일본은 36년간 민둥산을 푸른 산으로 바꿨고 철도를 부설했으며 수전(水電)을 늘리는 등 많은 이익을 한국인에게 주었다”고 강변했다.

격분한 한국 대표단은 회담장 테이블을 박차고 나와 ‘구보다 망언’을 철회하지 않는 한 회담 재개는 없다고 반발했다. 4년 반 동안 회담은 결렬 상태였다. 이후 회담은 다시 열렸지만 우여곡절의 연속이었다.

회담이 쉽지 않았던 이유는 일제 36년 식민지배를 보는 역사 인식의 차이에 있었다. 한국은 불법적 식민지배 청산의 관점에서 한·일 간 기본관계와 청구권 문제 해결에 주력했다. 반면에 합법적 조약에 기초한 통치로 본 일본은 역사 청산에 소극적이었다. 평화선(1952년 이승만 정부가 설정한 일본과의 해양경계선) 철폐와 재일교포 문제에 관심을 기울였다.

협상 과정에서 양국의 입장 차가 컸던 또 다른 배경도 있다. 우선 1951년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에 한국은 전승국 자격으로 참여하지 못해 동남아 국가들과 같은 배상 권리를 얻지 못했다는 점이다. 양국 간 국력 격차도 영향을 미쳤다. 1960년대 초반 한국은 빈곤국에서 벗어나지 못했지만 일본은 6·25 특수 등에 따라 큰 경제성장을 이뤘다. 한일조약이 체결된 1965년 당시 한국의 1인당 국내총생산(GDP)은 108달러, 일본은 900달러로 양국의 경제 격차는 10배에 달했다.

대일 강경론이 거셌던 이승만 정부 때와 달리 박정희 정부가 들어서자 분위기는 반전했다. 미국 케네디 정부는 아시아에서 일본의 적극적인 역할을 요청했다. 또 한·일 경제협력의 필요성을 강조하며, 한일회담 타결 없이는 추가 원조가 어렵다는 메시지도 한국에 전달했다. 더욱이 베트남에 대한 군사 개입을 확대하던 상황에서 미국은 한·일관계 개선을 중시했다.

1961년 11월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 자격으로 미국을 방문한 박정희는 케네디에게 한·일관계를 개선하겠다고 했다. 대통령 취임 후에도 박정희는 케네디에게 서한을 보내 한·일관계의 조속한 정상화를 약속했다.

자본·기술 도입하려 대일 관계 개선

정치적 이유 외에도 박정희는 한·일관계를 개선해야 경제성장도 가능하다고 여겼다. 1960년대 초반 1인당 국민소득 100달러에도 못 미치는 상황에서 경제개발과 산업화 달성은 시급했다. 이를 위해 일본과의 관계 개선을 통한 자본과 기술 도입이 필요했다. 당시 일본은 이케다 정권 출범 후 과거사에 대한 사죄와 보상의 의미를 배제하고 경제협력 명목으로 접근했다. 동남아시아 국가들과의 전후 처리에 적용한 ‘경제협력 방식’을 한국에도 적용했다. 자본이 아닌 공업제품과 용역을 지원하며 경제 진출의 토대로 활용했다. 박정희 정부는 개발자금 유치에 우선순위를 둔 힘겨운 외교전쟁을 치를 수밖에 없었다.

1965년 6월 22일, 7차 회담 때 한·일 양국은 세계 외교사에서 전례가 드문 14년 교섭(회의만 1500회)을 마무리짓고 ‘한일 기본조약’(한일협정)을 맺었다. 다음 날 박정희는 대국민 특별담화를 발표했다.

“각박한 국제사회의 경쟁 속에서 지난날의 감정에만 집착해 있을 수 없다. 아무리 어제의 원수라도 오늘과 내일을 위해 필요하다면 손을 잡아야 하는 것이 현명한 대처 아니겠는가.”

회담 타결로 일본은 무상 3억 달러, 유상 2억 달러, 상업차관 3억 달러 등 총 8억 달러를 한국에 제공하기로 했다. 당시 일본의 외화보유액이 14억 달러였음을 감안하면 적지 않은 액수였다. 사실 한국 정부는 1960년대 초부터 경제개발의 핵심인 제철공장 설립 자금을 마련하려고 애쓰고 있었다. 하지만 한반도 전쟁 위협에 따른 국가 리스크 때문에 원조는 들어왔지만 차관을 얻는 데는 실패를 거듭하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일본에서 자금이 들어온 것이다.

문제는 자금의 성격이었다. 박정희 정부는 식민지배의 실질 보상이라는 점을 명확히 규정하고자 했다. 반면에 일본은 경제협력의 일환이라는 입장이었다. 이런 입장 차는 회담 타결 후에도 양국 갈등의 장기화 요소로 작용했다.

박정희 정부는 이 돈을 어디에 썼을까. 1976년 경제기획원의 ‘청구권 백서’ 자료에 따르면 포항제철을 만드는 데 가장 많은 돈이 들었다. 유·무상 자금 1억1948만 달러와 광공업용으로 도입된 원자재 1억3282만 달러가 포철을 짓고 공장을 돌리는 데 쓰였다. 고 박태준 전 포스코 명예회장은 “우리 선조들의 피의 대가로 지어진 제철소”라고 말하기도 했다.

한·일 수직에서 수평적 관계로 변화

사회간접자본도 확충했다. 소양강 다목적댐과 경부고속도로 건설, 상수도 확장, 한강철교 복구, 영동화력발전소 건설, 철도시설 개선 등이 이때 이뤄졌다. 한국은 이 돈을 경제발전의 종잣돈으로 활용했다. 반면에 동남아 일부 국가들은 대일 배상금을 경제개발로 연결하지 못했다.

이후 한국은 ‘한강의 기적’으로 불릴 만큼 고도성장을 이뤘고, 양국의 격차는 점점 줄어들었다. 지난해 한국의 1인당 GDP는 3만6024달러로 일본(3만2476달러)을 제치기도 했다. 경제 규모는 일본이 여전히 한국의 2배가 넘는다. 하지만 과거 수직적·비대칭적 관계였던 한·일관계는 60년 만에 대등하고 수평적인 관계로 진화했다.

지난 60년 동안 한·일 양국은 많은 우여곡절을 겪었다. 수교 초기엔 냉전 질서하에서 미국과의 안보 동맹, 정치·경제 결속이 최우선이었다. 공산 진영을 상대로 한 자유주의 진영의 결속 강화가 중점이었던 만큼, 과거사 갈등은 수면 밑에 가라앉아 있었다.

탈냉전이 본격화한 1980년대 후반부터 역사·영토 문제가 표면에 부상했다. 냉랭하던 한·일관계는 1998년 ‘과거를 딛고 미래로’라는 김대중-오부치 파트너십 선언을 통해 새로운 협력 모델이 제시됐다.

하지만 양국 관계는 이내 후퇴했다. 2010년대는 미·중 경쟁의 가속화와 함께 위안부, 강제징용, 일본의 수출규제, 노 재팬 운동 등 갈등이 확산된 ‘잃어버린 10년’이었다. GSOMIA(한일군사정보보호협정) 중단, 동해상 초계기 사건 등 안보 갈등까지 불거졌다. 그러다 2023년 이후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미·중 패권 경쟁, 글로벌 경제 분절화, 북한의 핵미사일 위협 등 복합적 위기 상황이 등장하며 양국은 협력의 필요성을 다시 인식했다. 셔틀외교 재개, 수출규제 해제, GSOMIA 정상화, 연 1100만 명이 넘는 인적 왕래 등으로 관계 개선을 이뤘다.

정치·외교적 변화에 비해 상대국에 대한 긍정과 신뢰, 공감대 형성은 여전히 미흡하다. 예컨대 2018년 강제동원 피해자들이 일본기업을 상대로 배상소송에서 승소하자, 일본 정부는 한일협정으로 청구권이 모두 해결됐다고 주장했다. 반면에 한국 대법원은 피해자 개인청구권이 소멸하지 않았다고 판결했다. 이런 법적 해석의 차이뿐 아니라 위안부·강제동원·역사교과서·야스쿠니신사 문제 등 갈등 요소는 상존한다.

한·일관계의 지속적 발전을 위해서는 세 가지가 중요하다. 첫째, 국민적 지지 확보와 전 분야의 실질적 협력이다. 둘째, 과거사 갈등의 전략적 관리와 학계·시민사회의 꾸준한 대화 노력이다. 셋째, 변화하는 국제정세와 양국의 전략적 이익 공유에 바탕을 둔 미래지향적 파트너십 추진이다.

한·일 수교 60주년을 맞은 올해, 김대중-오부치 선언을 계승하는 ‘한·일 파트너십 선언 2.0’ 구축을 위한 논의가 시작돼야 한다.

※다음은 ‘4·19혁명의 유산’‘5·16 군사정변’‘수능 30년 그리고 사교육’ 순입니다.

이원덕 국민대 일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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