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학 다큐 ‘기이한 생각…’ 김우창 교수·최정단 감독
철학이 영화가 될 수 있을까. 강연을 그대로 찍을 순 있지만, 학자의 관념적인 텍스트를 미학적인 영상물로 번역한다는 건 다른 문제다. 무모한 도전으로 보였던 최초의 인문학 다큐멘터리 영화 ‘기이한 생각의 바다에서’가 21년의 제작 기간을 거쳐 완성됐다. 올해 부산국제영화제에 출품됐고, 배급사를 물색 중이다. 사유의 주인공은 한국의 지성을 대표하는 김우창(89) 고려대 명예교수다. 2018년 이탈리아 최고 권위 학회인 아카데미아 암브로시아나 정회원으로 선정됐고, 2022년 금관문화훈장을 수훈한 인문학의 거목이다. 문학과 동서양철학, 과학·정치·예술 전방위로 사유의 지평을 펼쳐 왔기에 피에르 부르디외, 오에 겐자부로 같은 세계적 사상가들이 존경을 표하기도 했다. 그의 머릿속을 적잖이 아름다운 영상으로 풀어낸 건 제자 최정단(58) 감독이다. 2004년부터 한 손에 카메라를 든 채 스승을 따라다녔고, 오직 이 영화를 찍기 위해 회사를 차리고 젊음과 재산을 갈아 넣었다. 그 순수한 열정은 웬만한 아이돌 팬덤이 무색한데, 개인적인 이유는 아니다. 온 세상이 K컬처에 열광하지만 내가 누군지 알 수 없는 혼돈의 시대를 ‘K철학’으로 돌파하자는 제언이다.

폭설이 내린 겨울 아침. 가파른 계단에 쌓인 눈을 치우며 구십 노인이 조심조심 발걸음을 뗀다. 대문을 열고 신문을 줍더니 다시 계단을 힘겹게 올라 물기를 털고 신문을 펼친다. 영화는 이렇게 시작해 이렇게 끝난다. 대단한 볼거리는 없다. 김우창 교수와 부인이 40년 넘게 살고 있는 서울 평창동 주택은 정원이 밀림처럼 우거졌고, 실내엔 선대부터 쓰던 낡은 가구와 책들이 빼곡하다. 이 오래된 집을 중심으로 부부가 보내는 아날로그한 노년의 일상을 보고 있자니 빔 밴더스 감독의 영화 ‘퍼펙트 데이즈’가 떠오른다.

집안은 계단도 많고 보수할 곳 천지지만 이사할 마음은 없어 보인다. 세계적 수학자 김민형 워릭대 교수 등 자녀들의 걱정도 아랑곳없다. 검소한 성품 때문일까. 집안 구석구석을 비추는 카메라를 따라가며 깨닫는다. 이 집은 40년의 기억을 품은 공간. 장성한 손주가 어릴 적 그린 그림 같은 가족의 흔적에 온기가 감돈다. “기억이란 과거의 보존이 아니라 현재를 풍부하게 하며 주체적인 지속을 보장해주고 미래를 생각할 수 있게 하는 바탕”이라는 김 교수의 철학 그대로다. 밀림 같은 정원 또한 “자연에 기술적으로 대응하는 것이 아니라 자연과 조화되는 삶을 살 때 행복할 수 있다”는 생태주의 그 자체다.
‘심미적 이성’ ‘구체적 보편성’ ‘생태주의’ 등으로 요약되는 김우창의 사유와 언행일치한 삶이 담긴 영화다. 그런데 20년 넘게 걸려 완성된 영화를 그는 볼 생각이 없다. “내 얼굴을 내가 봐서 뭐하겠어요. 애인 될 사람한테나 보여줘야지(웃음), 내가 무슨 흥미가 있겠어. 20년을 찍었대봤자 난 90년을 살았는데요.”(김)
김 교수 “한문이 우리 뿌리인데 안 배우면 쓰나”
왜 이렇게 제작 기간이 오래 걸렸나요.
최정단=“초기엔 강연 아카이빙이 목적이었어요. 번개 맞은 듯한 깨달음을 주는 선생님의 보석 같은 말씀들이 날아가 버리는 게 아까워 기록을 하다 보니 알리고 싶어졌죠. 한국 대표 석학을 대중은 전혀 모르잖아요. 강연만으론 영화가 안되는데 일상을 못 찍게 하셔서 이런저런 시도를 하며 세월이 갔어요. 막판에 일상을 공개해 주셔서 겨우 완성했죠.”
김우창=“보통사람 사는 게 다 똑같아요. 사건·사고가 있어야 영화가 될텐데, 일상이 무슨 영화가 되나요. 허락한다고 종이에 사인한 적은 없는데 이렇게 됐네요.”
최=“5분 찍으면 나가라고 하시니 멋진 앵글도 잡을 수 없고, 언제 쫓겨날지 모르니 카메라 들고 눈치 보며 혼나면서 찍었죠. 인간 김우창을 보여주고 싶었기 때문에 자투리라도 모아서 영화로 만들었습니다.”
이 영화야말로 ‘심미적 이성’ 아닌가요.
김=“심미적 이성이란 이성을 추구하면서 그것이 저절로 아름다운 것이 되는 거죠. 가장 간단한 이성이 수학적 계산인데, 돈 계산만 하다 보면 답답해서 못살아요. 사람이 좋아하는 건 감각적인 아름다움이고 그 근본이 심미적인 건데, 그것만으로는 먹고살기 어려우니 이성을 추구하게 되죠. 돈을 벌면 집을 꾸밀 수 있잖아요. 서울이란 도시를 아름답게 잘 지어 놓으면 구경하러 많이 오고, 그러면 돈도 더 벌고 권력도 생깁니다. 돌고 도는 거죠.”
최=“K대중문화가 핫해졌지만 철학도 내세울 때가 됐어요. 큰 사상가의 존재가 그 나라 문화의 척도인데, K사상엔 선생님밖에 없잖아요. 외국에서 한국 문학을 가르칠 교재가 없어서 선생님이 50년 전에 쓰신 『궁핍한 시대의 시인』을 번역 중이에요. 선생님은 이미 2018년 암브로시아나에서 K컬처 르네상스를 예견하셨죠. 한국에도 동서양과 철학·정치·문학·과학을 다 아우르며 글 써온 사람이 있다는 걸 알리고 싶어요.”
K컬처 르네상스의 저력이 뭘까요.
김=“우리나라가 세계 여러 나라에 열린 문화라는 게 중요한 사실이죠. 역사학자 조지프 니덤은 중국이 하나의 나라가 된 걸 유감스러운 일로 봤어요. 서양보다 과학이 발달했던 중국이 통일 이후에는 다양한 생각들이 성장하기 어려웠다는 거죠. 유럽은 데카르트 같은 사람이 여기저기를 돌아다니며 생각을 전파했잖아요.”
AI시대에 인문학이 위기라고 합니다.
김=“한문을 못쓰게 되니 우리 문화의 뿌리가 약해진다 생각해요. 한문이 중국 문화인 줄 알지만 중국 사람도 일부러 배워야 되는 게 한문이죠. 우리는 집안에 누가 죽으면 한문으로 문집을 낼 정도로 한문에 대한 존중이 있었고, 그게 우리 뿌리이자 원천이거든요. 근본을 알게 해야 인문학도 발전할 겁니다. 일본이 한참 성장하다가 1920년대 이후 인문학에 관심을 가졌는데, 모두가 정치·경제에만 몰두해 인문학을 등한시 하니까 그걸 보충하려는 움직임이 나온 거죠. 우리도 위기가 새로운 출발점이 될 테죠.”
최 감독에게 스승 김우창은 늘 어려운 존재다. 한때는 멀리서 보이면 도망갈 정도였지만, 자살충동에 시달리던 20대 시절 김우창의 글에서 구원을 얻었다. “세상 의지할 곳 없을 때 선생님 말씀을 만났어요. 삶에서 고통은 불가피하고, 고통을 어떻게 대하느냐가 문제란 걸 알았죠. 선생님 글에는 고통 속에서도 삶을 긍정하는 시의 영혼이 있거든요.”(최)

세속을 초월한 듯한 김우창과의 대화는 쉽지 않았다. 관념의 세계에 머물며 개인적인 질문에도 자꾸 역사 속으로 도망갔는데, “역사 속에 살고 있으니까”란다. 소맷단이 헤어진 선친의 양복을 입고 있으니 과연 맞는 말이다. 영화 속에도 풍경처럼 존재하지만, 한 가지 반전은 고양이 사랑이다. 한때 20마리나 돌봤다는 길냥이들을 일일이 이름 지어 부르는 모습은 다정한 할아버지다. 동네 주민들의 원성에도 ‘모든 생명은 보호 받아야 마땅하고 안전하게 생명을 유지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게 그의 생태주의다. “졸졸 쫓아다니니 저절로 좋아할 수밖에요. 물론 좋아하기도 하지만, 갈 데 없는 고양이가 새끼까지 생기니 차마 쫓아낼 수 없잖아요. 먹여 살려야지.”(김)
계단 많은 집이 불편하지 않나요.
김=“전 주인이 공간적 독립성을 위해 계단을 많이 만든 건데, 대신 다니기 불편해졌죠. 사람이 모든 문제를 해결하고 살 순 없어요. 우리 동네는 높은 건물이 없어 좋죠. 한 프랑스 학자가 서울을 아파트공화국이라고 했는데, ‘아빠르트망’이란 말 자체가 쪼개졌다, 온전하지 않다는 뜻이잖아요. 조그만 단독주택들이 모여서 연합체를 이루는 게 좋은 도시구성법인데, 산이 많아 자연히 그렇게 살게 돼 있는 서울이 아파트공화국이 된 것은 정상이 아니죠.”
신문을 줍는 장면이 반복되는데요.
최=“평생 일상에 변화가 없으신 분인데, 그걸 표현할 수 있는 게 신문을 줍고 마당을 쓰는 모습이었어요. 동양의 수행은 반복되는 루틴을 몸으로 직접 행하는 것이잖아요. 사모님도 ‘수도원에 갔어야 할 사람’이라고 하시는데, 그런 모습이 선생님의 삶의 태도 같았어요.”
김 교수는 “세상 돌아가는 걸 알아야 자기 삶을 조정할 수 있으니 신문을 보며 하루를 시작한다”고 했고, 인터뷰에 동석한 현광일 기획이사는 들뢰즈의 ‘차이와 반복’ 개념으로 설명했다. “선생님의 일상이 반복이지만, 끊임없이 세상과 교감하며 차이를 만들어 나가는 창구이자 상징적 코드가 신문”이란 것이다.
최 감독 “혼돈의 시대, K철학으로 돌파하자”

2014년 설립한 영화사 시월은 돈을 번 적이 없다. 최 감독이 사재를 털어 꾸려왔다. 넷플릭스 시리즈나 1600만 관객을 모은 영화 ‘극한직업’ 제작을 포기한 것도 여기 전념하기 위해서였다. “극한직업 시나리오가 재밌어서 잘될 줄은 알았지만 그런 대박은 예상 못했죠.(웃음) 그 영화로 돈을 벌었다면 좀 편했을 텐데, 가진 걸 다 팔아야 했네요. 소박맞지 않았냐고들 묻는데, 묵묵히 도와준 남편에게 감사할 뿐이죠.”(최)
젊음을 바친 영화 이후가 궁금합니다.
최=“영화가 10편은 나올 만큼 선생님을 찍었어요. 그 방대한 아카이브를 잠언집·유튜브·방송 등 다양한 미디어로 펼치고 싶은데 혼자서 할 일은 아닌 것 같아요. K철학의 전파를 위해 정부나 기업이 나서주셨으면 해요.”
한 인문학자를 20년간 기록했다는 것은 유례 없는 일이죠.
김=“아무것도 아닌 인간인데 쓸데없는 짓을 했죠. 너무 열심히 읽어주고 생각해주니 고마운 마음뿐입니다.”
최=“저희 회사명이 ‘시월(時越)’이잖아요. 재밌는 영상이 넘쳐나지만 시간을 뛰어넘어 근본적 질문을 던지는 영화는 많지 않아요. 이 영화에서 선생님은 대한민국 공동체에 시간과 공간·기억·고향·사물·존재에 관한 수많은 질문을 던지고 계시고, 지금은 안 보일지 몰라도 해답도 심어놓으셨죠. 선생님의 삶의 모습과 말씀 속에서 각자의 답을 찾아보시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