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규제 개혁은 역대 정부 출범 때마다 핵심 정책 공약으로 제시됐다. 낡은 규제들을 철폐하며 경제 활성화에 속도를 붙이겠다고 개혁 의지를 다졌지만 1년도 지나지 않아 흐지부지되기 일쑤였다. 규제 당국의 보수적인 입장과 이해관계자들의 득실 계산 속에 불필요한 규제조차 관성적으로 유지되고 있다. 우리 경제의 잠재성장률 하락을 극복하려면 기술 혁신과 규제 혁파를 통해 생산성을 높이고 미래 성장 동력을 확보해야 한다. 이를 위해 전문가들은 ‘규제 시스템 재정비’를 최우선 과제로 꼽고 있다. 산업통상자원부 규제개혁위원장인 강병구 고려대 표준지식학과 명예교수는 26일 서울경제신문과의 인터뷰에서 “과거 정부에서 왜 규제 개혁에 실패했는지 원인을 분석해 새 정부 초기에 시스템을 바로잡고 강한 리더십으로 밀어붙여야 한다”고 강조했다. 차기 대통령이 규제 개혁을 위한 사회적 합의의 주역이 돼야 한다는 의미다. 강 교수는 “규제를 만들 때부터 어떻게 사후 평가를 할지 정해둬야 기득권의 반발이나 관련 부처와 정치권의 개입으로부터 자유로운 규제 개혁이 가능할 것”이라고 지적했다.

-새 정부 출범 때마다 규제 개혁을 외쳤지만 성과는 미미하다.
△규제 개혁은 역대 대통령 후보마다 내놓은 단골 메뉴다. 이명박 정부는 낡은 규제를 ‘전봇대’, 박근혜 정부는 ‘손톱 밑 가시’, 문재인 정부는 ‘붉은 깃발’, 윤석열 정부는 ‘모래주머니’ 등으로 말하며 뿌리 뽑겠다고 장담했다. 하지만 정치적 구호에 그칠 뿐 여전히 규제는 그대로다.
-왜 규제는 한번 만들면 없애기 어려운가.
△규제는 법으로 제정되면 폐지하거나 수정하기 어렵다. 공무원 입장에서는 기존 규제 폐지가 실수로 연결돼 징계나 불이익을 받을 수 있기 때문에 보수적으로 대응할 수밖에 없다. 법을 손대는 순간 본인의 책임 문제가 발생해 심지어 명백히 불필요한 규제조차 관성적으로 유지된다. 이 구조 자체가 규제 개혁의 장애물이다.
-22대 국회의 규제 법안이 지난달 25일까지 2830건에 달했다.
△의원 입법은 정부 입법과 달리 규제영향평가를 거치지 않기 때문에 규제 법안이 남발된다. 민원 해결과 관련되거나 특정 지역과 집단의 이해만 반영된 입법이 전체 사회에 미치는 파급효과에 대한 체계적 검토가 없다. 입법은 국회가 하고 시행은 정부가 하다 보니 책임 소재도 모호하다. 이런 절차의 비대칭성이 규제의 질을 떨어뜨린다.
-규제 샌드박스의 효과가 있었는가.
△지금까지 1800여 건의 규제 샌드박스 사례 중 19.7%만 기업인들이 만족한다고 답했다. 제도 설계는 좋았지만 행정절차가 복잡했다. 특히 그림자 규제는 주무 부처의 보수적인 법령 유권 해석 등으로 해결되지 않았다. 평가 체계와 책임 구조를 명확히 해야 한다.
-대선 후보들의 규제 개혁 공약을 어떻게 보는가.
△규제 개혁에는 모두 공감하지만 방법론은 다르다.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후보는 규제 합리화를 통한 행정 서비스 쇄신 등을 내세우는 반면 김문수 국민의힘 후보는 규제혁신처, 기업민원담당수석 도입 등을 통해 기업 규제 자체를 완화하겠다는 입장이다. 하지만 두 후보 모두 구체적이지는 않다. 이준석 개혁신당 후보는 ‘규제 기준 국가제’와 ‘규제심판원’ 도입을 제안했다.

-대선에서 규제 개혁이 주요 의제가 되지 못하고 있는데.
△규제 개혁은 일반 국민이 체감하기 어려운 과제이므로 정치적 득표 전략으로 잘 작동하지 않는다. 대선에서는 표를 직접 얻을 수 있는 복지, 재정 지원, 지역 개발 공약이 우선이다. 규제 완화는 ‘보이지 않는 변화’에 가깝기 때문이다.
-새 정부의 규제 개혁 방안을 제안한다면.
△시스템 개혁이 우선이다. 규제를 만들기 전에 반드시 목적과 효과, 그리고 성과를 측정할 수 있는 지표를 설정해야 한다. 예컨대 중대재해처벌법과 관련해서도 ‘노동자의 안전 확보’라는 추상적 목표만 제시할 게 아니라 3년이나 5년 뒤에 산업재해 발생률을 몇 %까지 줄이겠다는 구체적 지표를 내놓아야 한다. 이런 접근 없이는 사후 평가가 불가능하고 결국 규제는 도입 당시의 명분만 남긴 채 방치된다.
-사후 평가가 중요하다는 말인가.
△규제가 실제로 사회 문제를 해결했는지 검증하는 유일한 방법이다. 현재는 평가가 거의 없고 성과 기준조차 없다. ‘타다금지법’ 이후 택시 산업이 과연 좋아졌는지에 대한 실증적 분석이 있었는지 묻고 싶다. 효과가 없는 규제를 지속하거나 심지어 강화하는 악순환을 막기 위해 사후 평가를 반드시 제도화해야 한다.
-평가 기준을 어떻게 설정해야 하는가.
△정책이나 여론 등 정성적으로만 평가하면 정책 효과가 과장되거나 왜곡될 수 있다. 정량적 지표는 명확하고 검증 가능하기 때문에 이해관계자 간 신뢰를 높이고 평가의 객관성을 확보할 수 있다. 물론 모든 성과를 수치화할 수는 없지만 주요 지표를 가시적으로 설정해야 향후 정책 판단이나 법 개정 때 근거로 활용할 수 있다.
-평가 기구의 구성 방안은.
△공무원이 주도하면 이해 충돌로 객관성이 떨어진다. 민간 전문가 중심의 독립적 기구가 규제의 성과와 영향을 평가해야 한다. 정부는 데이터 제공이나 행정 지원 역할에 그쳐야 한다. 위원회는 정치·관료·기업 등의 이해관계자로부터 자유로워야 객관성과 신뢰성을 확보할 수 있다.
-규제 개혁의 가장 큰 장애물은 무엇인가.
△정치적 포퓰리즘과 관료 조직의 관성이다. 관료들은 규제 완화에 따른 책임을 회피하려는 경향이 있다. 안전이나 환경 보호 등 사회적 규제는 기업에 영향을 미치는 경제적 규제의 성격도 동시에 지닌다. 사회적 규제 요구가 지나치게 커지면 경제적 문제는 등한시되고 시간이 흐른 뒤에는 과도한 사회적 규제가 심각한 경제적 문제를 부를 수 있다. 사회적 이슈와 경제적 이슈가 충돌하는 과정에서는 사회적 합의가 필요하다. 일방적인 규제는 감당할 수 없을 정도의 큰 비용을 초래할 수 있다.
-대선 후보들이 규제 개혁 전담 기구, 규제혁신처, 기업민원담당수석 등을 제안하고 있다.
△규제 혁신 기구들은 필요하지만 정부 주도 조직은 한계가 있다. 조직이 커지면 규제가 늘어난다. ‘공무원이 반도체를 몰라서 삼성이 성공했다’는 우스갯소리가 있는 것처럼 정부의 과도한 개입은 산업 발전을 저해할 수 있다. 미국의 정부효율부(DOGE) 같은 조직도 부작용이 더 클 수 있다고 생각한다. 한번 만들어놓은 규제 조직은 자칫 규제 개혁에 역행할 위험이 있다.
-경제 5단체가 제안한 메가 샌드박스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가.
△수도권 집중 해소와 새로운 산업·인구 유입을 위한 거점 도시 중심의 메가 샌드박스는 필요하다. 지역별 거점 도시는 지역에 특화된 인공지능(AI) 자율주행, 바이오 등 신기술 분야를 선택하고 중앙정부는 지방정부의 자율권을 보장하면서 이들이 규제의 범위를 선택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다만 메가 샌드박스의 진행이나 성과에 대한 모니터링은 중앙정부가 만든 독립적인 규제개혁위원회 같은 곳에서 일관성 있게 해야 한다.

-AI 관련 규제의 방향성은 어떻게 설정해야 하나.
△AI는 기술 특성상 개인정보·윤리·안전 등 다양한 사회적 이슈와 연결돼 있다. AI뿐 아니라 앞으로 발생할 신기술 분야의 대상은 글로벌 시장이다. 우리나라에서 적용하는 AI 규제가 우리의 주요 협력국과 다르게 적용된다면 기술을 개발하는 쪽이나 이를 활용하는 쪽이나 모두 어려운 상황에 처할 수밖에 없다.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려면 각국의 상황이 다르다 해도 전반적인 틀에서는 국제표준을 따라야 한다.
-이번 대선의 최대 화두가 ‘AI 강국 진입’이다. AI 산업 육성과 규제가 양립할 수 있는 방안은.
△규제는 산업 발전의 장애물이 아니라 ‘신뢰 기반’을 형성하는 요소다. 기업 입장에서도 규칙이 명확하면 투자 예측 가능성도 높아진다. 다만 과도한 규제는 위축 효과를 낳기 때문에 초기에는 ‘가이드라인’ 중심의 유연한 규제가 필요하다. 기술이 성숙한 뒤에는 성과 기반의 규제로 전환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한미 관세 협상에서 규제가 비관세장벽으로 거론된다.
△세계무역기구(WTO) 무역기술장벽(TBT) 협정문에는 규제의 목적보다 더 강한 규제는 비관세장벽으로 명시하고 있다. 더군다나 정치적 논리로 만들어지는 규제는 국제사회의 반발을 불러일으키고 수출 중심인 한국 경제에도 불리하게 작용한다.
-차기 정부의 규제 개혁 추진과 관련해 조언한다면.
△단기 성과 중심의 이벤트성 개혁이 아니라 제도적 기반을 강화하는 방식으로 접근해야 한다. 규제 사전 평가와 사후 평가를 제도화하고 민간 중심의 독립적 위원회를 운영해 입법 단계부터 평가 지표를 도입하는 등 구조적 접근이 필요하다. 무엇보다 대통령의 의지와 관심이 개혁의 지속성과 실효성을 좌우한다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한다.
◆He is…
1958년 부산에서 태어나 서라벌고와 고려대 경영학과를 졸업하고 미국 조지아주립대에서 경영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고려대 경영학부 교수로 재직하던 중 2015년 민간 스카우트 1호 공무원으로 국가기술표준원 표준정책국장에 영입됐다. 현재 산업통상자원부 규제개혁위원장과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표준적합성소위원회(SCSC) 의장을 맡고 있다. 고려대 경상대학장·경영정보대학원장을 거쳐 지난해부터 고려대 표준지식학과 명예교수로 재직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