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뉴스핌]이영란 편집위원/미술전문기자= 한국인에게 아랍에미리트는 '석유부국' 내지는 '급격하게 성장한 나라'로 알려져 있다. 또 사회 분위기가 전통을 고수하고, 보수적이어서 현대미술도 그럴 것이라 여기기 십상이다. 하지만 서울에 막 보따리를 푼 아랍에미리트의 동시대 미술은 더없이 과감하고, 파격적인 것들이 많아 우리의 고정관념을 뒤흔든다.
서울시립미술관(관장 최은주)이 아랍에미리트 현대미술전 '근접한 세계(PROXIMITIES)'를 12월 16일 서소문 본관에서 개막했다. 2026년 3월 29일까지 열리는 이 전시는 국내에서 처음 열리는 대규모 아랍에미리트 현대미술 기획전이다. 전시에는 건국 이래 풍부한 천연자원을 근간으로 이주와 도시변혁이 지난 반세기간 숨가쁘게 이어진 아랍에미리트 일대 작가 40여 명(팀)의 작품 110점이 출품됐다.

이번 전시는 서울시립미술관과 아부다비음악예술재단(ADMAF)의 두 번째 협력 프로젝트다. 올 5,6월 아부다비에서 성황리에 개최된 한국의 미디어아트전 'Layered Medium: We Are in Open Circuit'에 이어, 이번에는 아랍에미리트 작가들의 작품이 한국에서 소개되는 것. 양국 작가들이 서로 미술담론을 교류하고, 소장품과 작업을 선보임으로써 한국과 아랍에미리트간 초국적인 예술협력을 촉진하고 상호문화적 이해를 심화하는 것이 교류의 목표다.
전시는 1980년대부터 현재까지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는 3세대 작가들의 회화 영상 설치 등 다양한 장르의 작품들이 나와 '사막의 나라' UAE의 현대미술 변화와 궤적을 다각도로 보여주고 있다.
전시 타이틀인 '근접한 세계'는 정보통신 기술의 발달로 이제 전지구적으로 물리적, 심리적 거리가 압축된 현대사회를 반영하며, 지리적 경계를 뛰어넘어 타자·사물·역사 그리고 개별 국가가 근접한 관계로 맞닿아가는 현상을 지칭한다. 따라서 전시는 서로 다른 국가권에 역사, 문화기반도 다른 두 세계가 조우하며 엮어내는 동시대적 '근접성'에 대해 고찰하고 있다. 즉 아랍에미리트와 한국이 공유하는 변화의 동력과 그 미래적 방향성을 예술로 들여다보는 프로그램인 셈이다.

전시는 총 3개의 섹션으로 짜여졌다. 서울시립미술관과 ADMAF의 공동 기획자 외에도 총 3명(팀)의 게스트 큐레이터가 작가이자 섹션별 기획자로 참여했다. 이들은 각기 다른 관점을 제시하며, 한국과 아랍에미리트의 지역성과 글로벌 정체성 간의 긴장을 탐색하고, 세계화된 동시대 사회의 복잡성과 유동성을 짚어냈다.
3 개의 섹션은 서로 다른 만남과 독해의 방식을 제안한다. 예술가이자 큐레이터로 활동하는 작가들은 자신의 실천과 공명하는 주제를 바탕으로 초대됐고, 기획자인 김은주 서울시립미술관 학예연구사와 마야 엘 칼릴 아부다비음악예술재단 큐레이터는 세계를 마주하는 태도를 고찰하는 동료 작가들을 모았다. 각 섹션을 중심으로 주변 작품들이 연결되고 관점이 이어지는데, 이 연결점들은 서로 다른 문화적 항해가 이뤄지는 생산적인 간극이 된다.
첫번째 섹션의 '회전의 장소'는 사진작가 파라 알 카시미가 제안하는 '심장 공간(heartspace)'개념을 중심으로 익숙한 일상의 변형을 탐색한 작품들이 나왔다. 파라 알 카시미는 1990–2000년대 걸프 대중문화의 미학을 통해 익숙한 일상을 낯선 무대로 전환시키는 방식을 선보인다. 집처럼 꾸며진 공간에서 내면세계와 급변하는 외부세계가 서로 충돌하며 발생하는 기이함과 부조화가 이채롭다.

마이타 압달라는 '몽상과 악몽 사이에서'라는 연작을 출품했다. 빠르게 변하는 세태 속에서 청소년기에서 성인기로 넘어가는 전환의 순간을 담은 사진 연작들은 신화·몽상·스토리텔링을 조합해 자아의 의미를 엉뚱하게 드러낸다. 지역민담에서 영감을 받아 새와 돼지 같은 동물로 분한 인간이 마치 연극의 한 장면같은 대립된 순간을 보여주고 있다. 순수와 죄, 성장의 이중성 등 말하기 어려운 현실을 빗댄 우화같은 작품이다.
남녀 모두 전통복식을 고집하고, 특히 여성은 히잡 착용이 오랫동안 고착화되어서일까. 이번 아랍권 작가들의 인물화 내지는 인물표현에서 얼굴이 실종된 작품이 유난히 많아 이채로왔다. 심지어 영상작업과 뉴미디어 아트에서도 얼굴, 즉 누구인가를 인식케 하는 눈 코 입은 사라진 것이 공통점이다.
알리야 알 아와디의 '주검'이란 회화는 전복적이면서 통렬하다. 여성의 신체에 대한 자기결정권을 보호해온 미국의 '로 대 웨이드' 판결이 폐기된 후 온라인에 달린 '시체 보다도 적은 권리'라는 누군가의 댓글에 반응하며 제작한 작품이다. 결박된 여성 신체와 폭력의 장소로 프레임된 신체를 통해 여성의 분노 슬픔 욕망을 시니컬하게 형상화했다.

슬리퍼 밑창을 닮은 돌을 끈질기게 모아, 그 돌 위에 발가락 고리를 덧붙여 '스톤(돌) 슬리퍼'를 제작한 압둘라 알 사아디의 설치미술은 가장 가벼워야 할 슬리퍼(일명 쪼리)를 역설적으로 가장 무겁게 대체하고 있어 눈길을 끈다. 가상의 유목민들이 세계를 떠돌며 끝내 찾지 못할 그 무언가를 찾아 헤매는 것을 상상하며 만든 작품이다. 돌 슬리퍼를 착안한 것은 바위가 많은 지역에서 자란 자신의 고향에 대한 깊은 애착에서 비롯됐다.
섹션 1에서 가장 내밀한 작업은 주마이리의 '아랍어로, 쉼표'라는 설치미술이다. 작가는 진분홍빛으로 물들인 모래로 사막 풍경을 조성했다. 사막의 색조는 팝 아이콘, 바이인형을 연상시키거나 유방암 인식캠페인을 떠올리게 한다. 혹자는 분홍빛 사막이 종말론적 세계를 연상케 한다고도 할 수 있다. 한가지 흥미로운 것은 분홍 모래를 밟으며 관객이 이동할 때마다 전자음의 비명과 으르렁거림이 발생하며 예기치못한 감각을 자극한다는 점이다.

섹션 2의 '지형이 아닌, 거리를 기록하기'는 모하메드 카짐과 크리스티아나 데 마르키가 기획했다. 이들은 '통제로서의 지도'가 아닌 관계와 권력으로 형성되는 공간의 의미를 재조명했다. '누가 영토를 명명할 권한을 갖는가?'라는 질문을 던지며, 실제 지형이 아닌 '사람 간의 감정적·정치적·심리적 간극'을 예술로 기록했다.
1990년대 아랍에미리트의 급격한 도시화가 진행되는 과정을 직접 겪은 두 큐레이터는 노동, 이주노동자 등 사회적 계층의 흔적을 관찰하며 보이지 않는 권력구조를 파고들었다. 이 섹션의 작가들은 언어의 번역과 이주 서사를 통해 공간의 유동성을 탐구하며, 공간에 새겨진 권력과 역사를 누가 어떻게 기록하는지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을 제기한다.
섹션 2의 말미에는 누줌 알가넴의 2채널 비디오 작업인 '통로'가 상영되고 있다. 이번 전시에서 놓쳐선 안될 중요한 작품이다. 대형 스크린 양면에는 서로 마주 보도록 투사된 '현실'과 '허구' 두개의 서사가 얽혀 드라마틱하게 전개된다. 이 영상은 베니스비엔날레에 출품됐던 작품이다.

보다 젊은 작가들이 운집한 섹션 3는 제목부터 '그것, 양서류'로 파격을 보여준다. 라민 하에리자데, 로크니 하에리자데, 헤삼 라흐마니안 등 세 명의 유망작가가 뭉친 아티스트 트리오 RRH는 작업실이자 생활공간인 '집'을 창작의 중심으로 삼아 끊임없이 진화하는 예술세계를 선보인다.
RRH는 지난 1971년 건국한 아랍에미리트의 건국 50주년 이후에 주목하며, 삶과 예술이 뒤섞인 에미리트 예술공동체의 혼종성과 제도 안팎의 경계를 넘나드는 독립적인 '양서류적' 실천을 탐구했다. 특히 넬슨 굿맨의 질문 "언제 무엇이 예술이 되는가?"를 바탕으로, 예술이 살아 있는 탐구방식으로 전환되는 과정을 조명했다. 예술이 삶과 의식, 집단적 상징 속에 자리하며 성찰의 도구로 작동함을 강조하고, 이를 통해 에미리트 예술 공동체의 혼종적 감각과 세대 간 연속성을 드러내고 있다.
이번 '근접한 세계'전은 관람객이 자신이 마주한 세계를 다르게 인식하고, 자신만의 세계를 구축하는 과정을 재발견하도록 유도한다. 아랍에미리트 동시대 미술이 제안하는 또다른 시각을 통해 우리는 이같은 성찰을 심화하고, 세계를 확장하는 태도를 기를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최은주 서울시립미술관장은 "이번 전시는 국내에서 개최되는 아랍에미리트 현대미술 전시 중 가장 큰 규모로, '근접한 세계'라는 전시 제목이 나오기까지 고심을 많이 했다. 제목이 시사하듯 서로 다른 문화권이지만 동시에 동양 문화권에 속하는 두 국가가 문화적·지리적 경계를 초월해 예술적 연결의 가치를 탐색하고 미래의 발전방향을 함께 모색하는 중요한 계기가 될 것"이라고 전했다.
이번 전시는 아라비아반도 동부의 7개 에미리트가 결합돼 탄생한 국가 특유의 복합성과 이주성이 입체적으로 드러나 있다. 허허벌판의 너른 섬에 순식간에 최첨단 초대형의 뮤지엄 아일랜드가 생기고, 사막에 초고층 건물이 엄청난 속도로 세워지는 현상을 작가들은 저들만의 감각과 사유로 색다르게 기록하고 있다.
아부다비의 이 숨가쁜 속도전은 고도성장을 경험한 한국 관객에게도 친숙하다. 김은주 학예연구사는 "한국의 부모세대가 젊은 시절 겪었던 변화의 속도를 아랍에미리트의 오늘날에서 유추해 볼 수 있을 것"이라며 "아랍에미리트 작가들이 보여주는 세계는 한국 관객의 미감과도 연결될 수 있다"고 밝혔다.

아부다비음악예술재단의 마야 엘 칼릴 큐레이터는 "이번 전시는 지역적 특수성과 국제적 해독 가능성 사이에서 아이디어가 이동과 번역을 거치며 어떻게 변화하고 충돌하는지를 탐색하고 있다. 각 섹션은 서로 다른 만남의 방식을 제안하지만, 이들은 하나의 별자리처럼 연결돼 있다"고 전했다.
이번 전시는 문화적 전통과 미래성, 지역적 특수성과 세계적 흐름 사이를 가로지르며 두 문화권의 '근접성'을 성찰하게 한다. 전시는 예약 없이 무료로 관람할 수 있다. 전시기간 중 매일 오후 3시 해설이 진행되며, 다양한 연계 프로그램도 개최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