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주 상당산성과 친일파 민영휘

청주 시내에서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 상당산성이 있다. 청주 시민들이 즐겨 찾는 곳인데 입구가 넓은 잔디밭이라 군사시설이었다는 느낌이 전혀 들지 않는다. 여기를 처음 방문했을 때 유치원생들이 놀러 와 잔디밭에서 뒹굴고 있어 이곳의 평화로움을 더했다. 그런데 산성 남문을 통과해 조금 걷다 보면 얼굴이 이내 찡그려지면서 평화로웠던 마음도 흐트러진다. 산성 한가운데 넓게 자리한 대표적인 친일파 민영휘(閔泳徽, 1852~1935)의 아들 민대식(閔大植)과 민천식(閔天植)의 묘 때문이다. 지금은 형 민대식의 묘는 이장돼 없고 동생 민천식 묘만 남아 있다.
탐관오리로 출발, 친청·친일 오가
나라 기울 게 한 권력과 부의 욕망
일제 강점기 조선 최고 부자 등극
명당에 자신과 두 아들의 묘 마련
손자는 문화와 금융에 헌신 속죄
그늘과 빛이 한 집안 안에서 교차

이들 형제는 민영휘와 안유풍(安裕豊) 사이에서 난 아들들이다. 안유풍은 민영휘의 다섯 번째 측실인데 그녀를 가리켜서 부실(副室)이라고 했다. 흔히 첫 번째 처가 아닌 처를 후처라고 하는데 이렇게 부르지 않고 나라의 부통령처럼 부실이라고 불렀다. 서울의 휘문고와 풍문여고가 이들 부부가 세운 학교다. 휘문(徽文)의 ‘휘’는 민영휘의 자에서, 풍문(豊文)의 ‘풍’은 안유풍의 자에서 각각 따왔다. 두 학교가 강남으로 이사 가기 전까지는 종로구 율곡로에 나란히 위치해 휘문고는 계동의 현대건설 사옥 자리에, 풍문여고는 서울공예박물관 자리에 있었다.

고종에 실물 크기 금송아지 상납
민영휘는 휘문고의 전신인 휘문의숙을 세우지 않았으면 평생 나쁜 짓만 골라서 한 사람이라는 악평을 듣는다. 살아생전 벼슬하면서 국가를 위해서 일한 적은 없고, 벼슬을 이용해 오로지 자신의 안일만을 도모해서다. 그는 민 황후의 먼 일족 중 하나였는데 찢어지게 가난해서인지 벼슬에 오르자마자 부정부패를 서슴지 않고 자행했다. 그가 평안도 관찰사로 재직할 때 금으로 만든 실물 크기의 송아지를 고종에게 상납하자 고종의 얼굴빛이 변하면서 “전임 관찰사 남정철은 정말로 큰 도둑이다. 관서지방에 금이 이렇게 많은데 조금만 상납하고 혼자 독식했단 말인가?”라고 화를 냈다고 한다.

민영휘는 이렇게 모은 돈을 늘리기 위해 지저분한 일도 마다치 않았다. 그의 집에는 수십 명의 시녀가 있었는데 부자에게 몸을 팔고 하룻밤에 20~50원이나 되는 큰돈을 받아 일부를 주인에게 바쳤다고 한다. 그러니 포주 노릇까지 한 셈인데 당시 주한일본영사관의 보고서에 따른 내용이다. 이처럼 돈을 모아서인지 일제강점기 때는 조선 최고의 부자가 되었다. 그때 이완용 재산은 300만 원이었는데 민영휘는 20배 많은 6000만 원이었다. 그는 일제로부터 작위 받은 사람으로 대자본가로 변신하는 데 성공했어도 권력형 부정축재자의 범주를 벗어나지 못했다.
흥미로운 건 민영휘가 원래 친일파가 아니라 골수 친청파였다는 사실이다. 민씨 일족의 핵심이던 민영익(閔泳翊)이 고종과 위안스카이(遠世凱)에게 동시에 버림받아 영향력을 잃자 민영휘가 그를 대신해서 청나라와 밀착한 수구파의 거두가 되었다. 1884년 갑신정변이 일어나자 그는 청나라 군대를 끌어들여서 김옥균 등의 급진개화파를 제거하고, 사대당 내각에 들어가서 전권을 휘둘렀다. 그로부터 10년 후인 1894년 동학 농민군이 봉기하자 이의 진압을 위해서 민씨 일족을 대리해 위안스카이에게 매달려서 청나라 군대를 불러들였다. 이것이 청일전쟁의 직접적 원인이 되었으니 전쟁의 도화선 역할을 한 셈이다.
그러지 않아도 동학 농민군이 봉기했을 때 민영휘를 축출하지 않으면 몸이 갈라지고 뼈가 부서져도 영원히 해산하지 않겠다고 소리 높였다. 그럴 정도로 민심과 이반 된 사람이었다. 청일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해 온건 개화파인 김홍집 내각에 의해 갑오경장이 실시되자 그는 탐관오리로 곧바로 지목돼 진령군과 함께 처단될 뻔했는데, 어찌 된 일인지 유배형에 그쳐 용케 살아남았다. 그리고 유배지인 전남 신안군 임자도의 감시가 소홀한 틈을 타서 탈출에 성공해 청나라로 도망쳤는데 얼마 안 돼 대사면령이 내리자 대원군의 장남 이준용과 교환돼 당당히 귀국해서 중추원 의장이 되었다.
전국에 축구장 8000배 땅 소유

청일전쟁 후에는 일본이 청나라를 제치고 조선에서 힘을 발휘하자 1900년 친청파에서 친일파로 돌연 변신했다. 그리고 친청파라는 과거 흔적을 지우기 위해서였는지 원래 이름인 민영준(閔泳駿)을 버리고 민영휘로 개명했다. 한일병합 후에는 그의 친일 행적이 인정돼 일본 정부로부터 자작의 작위와 5만 원의 은사금을 수여 받았다. 한편 민영휘는 땅을 많이 사들여 함경도를 제외한 전국에 축구장 8000배 크기의 땅을 소유했다. 이렇게 많은 땅을 소유한 데는 민 황후 재산도 한몫했다. 이에 민 황후가 경복궁에서 시해되자 그녀의 재산 관리인으로 가로챘다는 설이 당시 자자했다.
해방 후에는 이 땅들이 모두 몰수됐는데 상당산성에 있는 땅만은 신탁 등록이 돼 뺏기지 않았다. 민영휘는 어째서 이 땅을 신탁 등록했을까? 풍수지리적으로 명당 중 명당이어서라고 본다. 좌청룡 우백호가 겹으로 형성돼 학이 날개를 활짝 편 모양인 데다 양쪽으로 개천이 구불구불 흐르고 앞에는 호수가 있어 풍수 전문가가 아니더라도 명당자리임을 쉽게 알 수 있다. 민영휘의 둘째 아들 민천식이 자손을 보지 못하고 31살의 젊은 나이에 죽자 여기에 묻혔다.
그러자 민대식의 둘째 아들 민병도(閔丙燾)가 민천식의 양자로 입양됐다. 민병도는 할아버지 민영휘와 달리 좋은 일을 많이 했다. 1962년부터 1년간 한국은행 총재를 지냈는데 5·16 군사정부의 갑작스러운 통화개혁과 증권파동으로 생겨난 문제점들을 잘 수습했다. 또 어업차관의 무리한 도입에 따른 정권의 압력과 재무부의 은행감독원 장악 시도에 반발해서 총재직을 사직해 중앙은행 독립정신의 표본이란 평을 들었다.
조부와는 다른 길 걸은 손자 민병도

민병도는 해방 후 정인보·최남선·여운형·안재홍 등과 함께 을유문화사를 세웠다. 1945년 을유년에 세워져 을유문화사가 되었는데 설립 당시 정인보가 그에게 다음과 같이 권했다. “내 말을 듣고 출판업을 시작해라. 35년 동안 일제에 빼앗긴 대한의 문화유산, 언어, 문자, 이름까지 되찾으려면 35년이 또 걸린다. 지금은 문화유산을 되찾는 일이 진정한 애국자의 길이니 이 일을 하려면 출판업을 해야 한다.” 민병도가 이 말을 듣고서 곧바로 을유문화사를 세웠으니 할아버지 민영휘와는 결을 달리했다고 본다.
또 만주에서 활약하던 지휘자 임원식이 해방 후 귀국하자 민병도는 문화예술계 인사들의 뜻을 받들어서 국내 최초의 교향악단인 고려교향악단을 창설했다. 그 맥은 현재 서울시립교향악단으로 계승되었다. 그 후 임원식이 예원학교와 서울예고를 설립하자 이 학교를 꾸준히 후원했다. 또 비가 오면 반쯤 물에 잠겨서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던 남이섬을 1965년에 인수했다. 그리고 수천 그루의 나무를 여기에 심어 한류 문화의 본거지로 지금의 남이섬을 조성했다. 1975년에는 이런 공로를 인정받아 정부로부터 국민훈장 모란장을 수여 받았다.
민병도가 이렇게 헌신했어도 할아버지가 저지른 죄로부터 과연 용서받을 수 있을까? 용서받기에는 민영휘가 저지른 죄가 너무 크지 않은가. 그래도 친일 인사의 다른 후손들과 달리 할아버지 죄를 용서받기 위해 평생 애쓴 게 사실이다. 이완용을 비롯한 을사오적 후손 중에 민병도와 같은 사람을 발견하기가 쉽지 않다. 그래서 친일이냐 아니냐의 여부를 기계적으로 판단하는 건 바람직하지 않다. 오히려 민병도 같은 사람을 품을 때 우리 사회가 더욱 성숙해질 수 있지 않을까? 정인보도 그런 관점에서 민병도에게 출판사 설립을 권한 거라고 본다.

한편 박정희 대통령의 주치의로 오랫동안 봉직한 민헌기 전 서울대 의대 교수는 민영휘의 증손자로 민병도의 조카다. 그는 1974년 육영수 여사가 총에 맞았을 때 수술을 지휘하고, 1979년 10·26사태로 사망한 박 대통령의 시신도 수습했다. 그런데 민병도의 전임자가 지홍창이었는데 구한말 민영휘의 처단을 가장 앞장서서 주창한 종두법의 보급자 지석영의 장손이었으니까 역사의 아이러니라고나 할까?
김정탁 노장사상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