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임신하고 중절하는 걸 도와주면, 1억엔을 줄게요."
중증 장애가 있어 온종일 침대 위에서 시간을 보내는 40대 여성 이자와 샤카. 그가 어느 날 남성 간병인에게 은밀한 제안을 건넨다. "내 휘어진 몸속에서 태아는 제대로 크지 못할 것"이지만 "임신과 중절까지라면 보통 사람처럼 가능할 것"이라는 욕망을 드러내며.

장애 여성의 욕망을 다룬 자전적 내용으로 일본의 아쿠타가와상을 받은 이치카와 사오의 소설 『헌치백』이 연극으로 국내 관객을 찾아온다. 연극 '그을린 사랑', '와이프' 등으로 백상예술대상·동아연극상 등을 받은 신유청(44)이 연출을 맡았다. 12일 개막을 앞두고 런스루 리허설을 소화 중인 신 연출을 지난달 30일 서울 국립극장에서 만났다. 다음은 일문일답.
장애인 작가의 자전적 소설을 연극으로 만들었다. 부담은 없었나.
어려운 일이었다. 비장애인이 장애인을 연기하는 것 자체에 대한 우려도 있었다. 걱정이 많았지만, 결국 우리가 왜 이 작품을 하려고 했는지를 잊지 않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샤카의 글, 작가가 써놓은 그 말들을 향해 나아가는 일이 중요하다고 느꼈다.
원작엔 적나라한 표현이 자주 나온다. 속마음을 길게 풀어놓은 대목도 많다. 어떻게 무대로 옮겼나.
샤카의 욕망은 단순히 성적이거나 야한 것, 이성 사이에서 일어나는 특수한 욕구가 아니라 인간 대 인간으로 타인과 마찰하고 싶고, 때로는 충돌까지 하고 싶은 원초적인 감정일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일부 수위가 높은 표현은 그대로 옮기지 않았고 무대에 맞게 각색했다.

여러 배우가 샤카를 연기하는 구성이다.
처음에는 샤카를 연기할 수 있는 배우를 찾으려 했지만 원작과 꼭 들어맞는 샤카를 섭외하는 일은 불가능했다. 자전적인 소설이긴 하지만 작가조차도 샤카와 동일 인물은 아니지 않나. 그래서 여러 배우가 샤카를 연기하는 방식을 택했다. 샤카를 있는 그대로 재현하는 것만이 방법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과거 연출작들과는 다른 시도로 느껴진다.
'더 웨일'을 연출했을 때는 배우에게 분장을 입혀 고도비만인 찰리의 외형을 최대한 리얼하게 구현하려 했다. 이번 작품에서는 형식적으로 다른 접근을 택했다. 샤카를 현실적인 외형으로 재현하지 않고도 관객이 그 존재를 만날 수 있다고 믿었다. 무모한 시도일 수 있지만, '없음'에서 출발해 무언가를 드러내는 것이야말로 연극만이 할 수 있는 일 아닐까.

원문을 살린 대사가 많다고.
도입부는 소설 문장을 그대로 사용했다. 구어체로 바꾸지 않아 낭독극 같은 느낌이 난다. 배우들 역시 샤카에 대해 설명하듯 말하다가, 점차 샤카의 마음에 가까워지면서 샤카 자신이 된다. 제삼자에서 당사자로 변화하는 흐름이 중요하다고 느꼈다.

연극을 통해 무얼 말하고 싶었나.
생명에는 밝은 면만 있는 게 아니라 어둠과 고통도 있다. 그 고통까지도 받아들이는 것이 온전한 삶 아닐까. 죽은 땅에서 솟아나는 싹 같은 생명도 있다는 걸 샤카를 통해 보여주고 싶었다.
연극 '와이프' 등에서도 소수자 정체성을 다뤘다. 소수자의 이야기를 해야 한다는 사명감이 있나.
내가 사명감을 가진 사람, 착한 사람이라서가 아니라 연극이라는 장르가 본디 그렇다. 시대보다 한발 앞서 주변부를 비춘다. 나는 그 흐름을 따라가는 것뿐이다.
연극 '헌치백'은 오는 12일부터 15일까지 서울 국립극장에서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