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K그룹 창업주의 사저였던 전통 한옥 ‘선혜원(鮮慧院)’이 미술 전시를 포함해 다양한 문화를 포용하는 복합문화공간으로 재탄생했다. ‘지혜를 베풀다’는 뜻을 품고 그룹의 인재를 길러온 SK의 유서 깊은 장소가 이제 문화와 예술로 손님을 맞이하는 특별한 공간으로 거듭났다.

4일 SK 계열사가 운영하는 포도뮤지엄에 따르면 서울 삼청동 선혜원에서 3일부터 첫 전시인 ‘선혜원 아트 프로젝트 1.0’이 열리고 있다. 선혜원은 고(故) 최종건 SK그룹 초대 회장이 1968년 사저로 매입해 생애 마지막까지 머물던 곳으로 최태원 회장이 유년 시절을 보낸 곳이기도 하다. 이후 SK그룹의 연수원으로 활용되던 이곳이 3년 간의 리모델링을 거쳐 누구나 이용할 수 있는 문화공간으로 탈바꿈했다. 2일 열린 개관식에 참석한 최태원 회장은 “제가 근처에서 중학교를 나왔는데 잔디 깔린 이곳 마당에서 축구를 자주 하곤 했다”며 내빈들에게 공간 구석구석을 안내하기도 했다.
새 공간의 첫 프로젝트의 주인공은 ‘보따리 작가’로 잘 알려진 김수자다. 그는 바느질에서 출발해 여성의 가사 노동 행위를 현대미술의 맥락 안에 위치시켜 일상과 예술의 접점을 넓힌 작가다. 7월 프랑스 문화예술 공로 훈장인 ‘오피시에’를 수훈한 그는 회화부터 설치, 퍼포먼스, 영상 등 다양한 매체를 넘나들며 집과 정체성에 관한 사유를 인류 보편의 문제로 확장시켜왔다.
10년 만에 개최되는 김수자의 전시는 장소 특정적 설치 작업인 ‘호흡’을 국내에서 최초로 선보인다는 점에서 주목받는다. 전통 한옥 건축에 설치된 첫 사례이기도 하다. 기자들에 먼저 공개된 작가의 ‘호흡’은 한옥 고유의 정적인 아름다움을 간직한 ‘경흥각’을 하나의 예술 작품으로 바꾸어 놓았다. 바닥 가득히 거울이 깔려 공간을 가득 메운 구조물은 물론 빛과 바람, 관객들의 호흡까지 반사하며 실제와 허상이 뒤섞이는 명상적 체험을 선사한다. 김수자는 “보따리의 건축적 해석이 ‘호흡'의 출발점”이라고 말했다. 그는 이어 “한옥의 격자 구조는 과거부터 제 작업의 아주 중요한 일부였고 언젠가는 한옥에서 새로운 작업을 하고 싶다는 생각을 오랫동안 해왔다”며 “작품 전시를 제안받고 선혜원에 도착해 경흥각의 문을 여는 순간 이 작업은 하지 않을 수 없겠구나 싶었다”고 덧붙였다.


관람객이 가장 먼저 마주할 로비에는 김수자의 보따리 작업이 품은 철학을 도자로 풀어낸 작품이 설치돼 있다. 조선 백자 달항아리를 모티브로 독일 마이센과 협업해 제작한 새하얗고 둥그런 그릇은 바늘 구멍 같은 입구 탓에 보따리를 연상시키기도, 완전한 보름달이 되기 직전의 천체를 떠올리게도 한다. 함께 전시된 ‘땅에 바느질하기 : 보이지 않는 바늘, 보이지 않는 실’은 보따리를 풀어헤친 형태다. 마르지 않은 백자토에 바늘로 수많은 구멍을 뚫어 독특한 감상을 준다. 지하 1층 삼청원에는 이동과 기억, 디아스포라에 대한 감상이 담긴 김수자의 대표 연작인 ‘보따리’ 세 개가 동그마니 자리했다. 작가는 “결국 이곳의 모든 것이 보따리에 대한 재해석”이라고 설명했다. 전시는 10월 19일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