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근 금융위원회가 타운홀 미팅을 통해 “당신이 금융 당국이라면 무엇을 하겠는가?”라는 대통령의 메시지를 현장에서 실천하고 있다고 한다. 이는 과거의 폐쇄적이고 관료 중심적인 정책 결정 문화를 넘어서는 변화로 새로운 정책 패러다임의 가능성을 보여준다.
내가 금융 당국이라면 어떨까. 필자는 한계 채무자에 대한 근본적 해법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지금의 채무 관리 시스템은 재기보다는 회수에 집중하는 방향으로 설계돼 있다. 연체가 발생하면 금융회사는 기한이익 상실을 이유로 채권을 신속히 추심회사에 매각하고 상환 의지가 있는 채무자마저 나락으로 빠뜨리는 악순환을 반복한다. 이 과정에서 채권은 헐값에 매각되며 가장 취약한 채무자일수록 가장 가혹한 추심에 노출된다.
금융사는 연체 채권을 손실 처리해 세제 혜택을 누리면서도 동시에 이를 되팔거나 추심해 수익을 추구한다. 특히 단돈 1만 원으로 소멸시효를 10년 연장할 수 있는 지급명령 제도는 경제활동을 재개하려는 채무자의 삶을 가로막는 장치로 변질됐다. 최근 대법원이 “시효 완성 후 일부 변제는 시효이익 포기의 추정 근거가 되지 않는다”고 판결한 것은 오랜 기간 유지되던 채권자 중심의 힘의 불균형을 시정하려는 중요한 법적 변화다.
정부의 대표적인 채무 조정 정책인 ‘새출발기금’이 현장에서 충분히 작동하지 못하는 원인에도 이 같은 구조적 문제가 있다. 금융사들은 채무 조정에 응하기보다 채권을 매각하거나 추심하는 쪽을 택한다. 실제로 금융회사의 채무 조정 부동의율이 65%를 넘는다.
이런 상황에서 해외 사례는 우리에게 중요한 시사점을 던진다. 선진국들은 채무자를 비용이 아닌 미래의 경제주체로 보고 인적 자본이라는 관점에서 접근한다. 미국은 ‘공정추심관행법(FDCPA)’을 통해 채무 검증 절차와 사적소송권을 보장하고 영국은 ‘부채구제명령(DRO)’을 통해 최저 취약 계층에게 신속한 면책을 제공한다. 독일은 추심업을 인가제로 엄격히 규율하고 단기 소멸시효와 권리자의 신속한 권리 행사를 유도한다. 이들은 공통적으로 ‘회복’을 정책의 중심에 두고 있으며 다층적 제도를 통해 재기의 사다리를 촘촘히 구축하고 있다.
맹자는 ‘항산항심(恒産恒心)’, 즉 안정된 생계 기반이 있어야 바른 마음이 생긴다고 설파했다. 지금 한국 금융정책에도 이 철학이 필요하다. 회복은 단발성 처방이 아니라 시간과 단계가 필요한 연속적 과정이다. 단기-중기-장기 회복형 채무 조정 체계의 구축이 시급하다. 이는 의료에서 환자의 상태에 따라 치료 체계를 달리하듯 채무자의 상황에 맞는 맞춤형 대응이 필요하다는 뜻이다.
단기적으로는 새출발기금에 동의하는 금융회사에 보증기관 출연료 인하 등의 실질적인 인센티브를 제공해야 한다. ‘상생이 곧 이익’이 되는 구조를 설계해야 하며 중기적으로는 ‘소멸시효 완성채권 관리 특별법’을 제정해 시효가 완성된 채권에 대한 매각 및 추심을 금지하고 지급명령 남용을 방지하는 요건을 강화해야 한다.
궁극적으로는 ‘장기연체자 회복지원기구’를 설립해 채무조정·복지·고용을 연계하는 원스톱 회복 플랫폼을 구축해야 한다. 단순한 재정 지원이 아니라 정밀한 데이터 기반 평가를 통해 회복 가능성이 있는 채무자에게 맞춤형 자원을 집중해야 한다. 이는 실패한 개인을 다시 경제의 일원으로 복귀시키는 가장 효과적인 투자이며 우리 사회의 회복 탄력성을 높이는 핵심 전략이다. 한계 채무자 구제는 시혜가 아니다. 우리 경제의 순환을 복원하고 사회적 신뢰를 회복하는 불가피한 선택이다. 이제는 배제의 악순환을 끊고 포용의 사다리를 놓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