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년중앙] 옻칠 반복해 칠살 오른 칠기, 아름다운데다 실용적이죠

2025-08-17

전복·조개 등 어패류의 껍데기를 얇고 판판하게 갈아 자개로 가공한 뒤, 이를 옻칠한 바탕에 붙여서 꾸민 기물을 나전칠기(螺鈿漆器)라 하죠. 나전칠기는 세계적으로 그 아름다움을 인정받는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공예품인데요. 2008년에는 빌 게이츠가 게임기 '엑스 박스'를 나전칠기로 표면을 장식한 한정판으로 제작했고, 2009년에는 나전칠기로 장식한 아이폰 케이스가 공개되기도 했죠.

나전칠기는 옻칠한 기물의 바탕을 장식하는 여러 기법 중 하나입니다. 옻나무 껍질에 칼·긁기낫 등으로 홈을 내면 옻나무가 상처 부위를 보호하기 위해 하얀 수액을 내보냅니다. 이 수액을 주걱칼로 긁어내 채취한 것을 옻 또는 옻액이라 해요. 옻액을 가공하여 만든 도료가 바로 옻칠이에요. 옻칠은 인류가 기원전 3000여 년 전부터 사용해 온 공예 재료이자 기술이죠. 우리나라에서는 청동기 시대 전라남도 여수 적량동 유적에서 출토된 비파형 동검이 가장 오래된 옻칠의 흔적입니다.

서울 종로구 안국동에 있는 서울공예박물관에서는 우리나라의 아름다운 유산인 옻칠 생산과 칠기 제작 과정을 체계적인 기록으로 남기고자 2020년부터 2024년까지 4년에 걸쳐 옻칠 관련 현지 조사 및 기술 아카이브 사업을 진행했어요. 그 결과를 전시 '칠(漆)-옻나무에서 칠기로'에서 만날 수 있어요. 서울공예박물관 수집연구과 강연경 학예사와 함께 옻나무에서 채취한 옻칠이 칠기로 이어지는 과정을 쉽고 재미있게 알아봅시다.

"옻칠은 쉽게 말해서 천연 소재로 만든 페인트인데요. 옻나무는 8~10년 정도 자라야 옻액을 채취할 수 있기 때문에 옻칠을 만들려면 매우 많은 시간과 노력을 쏟아야 해요. 또 옻나무가 옻액을 채취할 수 있을 만큼 자라도, 하루에 채취할 수 있는 옻액의 양은 극히 적어요." 하루 옻액 채취량은 매년 채취 시기와 기후, 강수량, 채취 장인의 역량에 따라 차이가 큰데요. 1년에 장인 1명이 350~400그루를 작업했을 때 일일 채취량은 최소 300g에서 최대 1kg입니다. 여기서 채취한 옻액의 10%는 나무껍질 등 불순물, 10%는 수분이에요. 옻액에서 불순물만 거른 상태를 생칠, 생칠에서 수분을 대부분 증발시킨 상태를 정제칠이라 하는데요. 300g~1kg였던 옻액은 생칠을 거쳐 정제칠로 가공하면 192~640g 정도만 남게 됩니다. 이 정도 양은 서울공예박물관에서 소장 중인 나전 모란넝쿨무늬경함(높이 23cm x 길이 41.7cm x 폭 19.7cm)의 모든 면을 1~2회 정도 도포할 수 있는 양이죠.

이렇게 많은 시간과 공을 들여야 하는 옻칠이 수천 년 동안 지속된 이유는 특유의 광택과 색감에서 느껴지는 아름다움 외에도 뛰어난 방수성·방염성 덕분이에요. 때문에 가슴 아픈 역사도 겪어야 했죠. 전시실에서 볼 수 있는 『조선총독부 중앙시험소 보고-채칠 시험 성적(제1보)』은 1917년 일제가 경상남도 함양에서 시행한 채칠 시험의 보고서예요. 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는 옻칠의 기능성에 주목해 생활용품은 물론 탄약상자·선박·기차 등 군수용품에도 옻칠을 활용하고자 옻나무를 전국적으로 적극적으로 식재해 옻칠의 생산량을 늘리려 했죠. 또 1916년부터 1925년까지 경상남도 함양, 평안북도 태천, 강원도 원주 등 주요 옻칠 생산지에서 채취 시험을 진행하기도 했어요.

'칠-옻나무에서 칠기로'의 핵심 전시품은 옻칠공예상자예요. 옻칠공예상자는 재료상자와 기법상자로 나뉩니다. 재료상자는 옻나무에서 채취한 수액을 옻칠로 가공하는 과정을, 기법상자는 기물 바탕에 옻칠을 하고 장식하는 과정을 다루죠. 전시실에 있는 옻칠공예상자의 형태는 활짝 펼친 병풍과 비슷했는데요. 상자 밑에는 바퀴가 달려있고, 차례대로 접으면 엘리베이터에 싣기에 충분한 크기라서 이동식 전시도 할 수 있어요.

먼저 92점의 표본을 통해 옻나무에서 채취한 수액을 옻칠로 가공하는 과정을 담은 재료상자부터 들여다볼까요. "옻칠은 옻액으로 만든 천연 도료인 전통 옻칠과 옻칠 대신 사용하는 인공 도료인 대용칠(화학 도료)로 구분해요. 전통 옻칠은 다시 정제 과정 유무에 따라 생칠과 정제칠로 나뉩니다. 옻나무에서 채취한 옻액에는 벌레·나무껍질과 같은 불순물이 들어있고, 수분이 많아 기물에 칠하면 주름이 생기거나 변색되기 쉬워요. 그래서 불순물을 거르고 수분을 증발시키는 정제 과정을 거칩니다." 강 학예사가 재료상자 속 생칠·정제칠의 시편(샘플 조각)을 가리키며 말했죠.

앞서 불순물만 거른 상태를 생칠이라 했죠. 회백색을 띠는 생칠은 옻칠 작업에서 가장 기본이 되는 칠이에요. 정제칠은 생칠의 수분을 3~5% 정도 남기고 증발시켜 만든 옻칠을 말하며, 검고 투명한 빛을 띱니다. 기물에 발랐을 때 생칠은 갈색의 반투명한 중간 두께의 도막이라면, 정제칠은 거의 투명한 얇은 도막인데요. 생칠과 정제칠은 옻칠의 단계에 따라 쓰임이 달라요. 예를 들어 나무 바탕에 옻칠을 총 7회 도포한다고 했을 때, 나무 바탕부터 4~5회차까지는 생칠을 발라 옻칠 도막을 쌓습니다. 그리고 6~7회차에 정제칠을 발라 광택을 주면서 마무리하는 거죠.

전통 옻칠의 생산량이 한정적이기 때문에 1950년대부터는 열대지방에서 재배되는 캐슈나무 열매껍질에서 추출한 액체를 가공해 만든 화학 도료인 캐슈를 옻칠 대용으로 사용하는 경우가 늘었죠. 캐슈는 옻칠보다 칠하기 용이하며 상온에서 15~20시간 정도 놓아두면 마르기 때문에 대량 생산도 가능해요. 그래서 저가의 칠기를 제작할 때 선호되죠. 하지만 제조 과정에서 납·포름알데히드 등 화학 물질이 발생해 식기 제작에는 부적합합니다.

옻칠도 페인트처럼 다양한 색을 낼 수 있는데, 이를 색칠이라 해요. 정제칠에 소나무·송진의 그을음인 송연, 들기름의 그을음인 유연, 산화철 등을 첨가하면 흑칠이 됩니다. 주칠은 붉은색 광물인 주사와 붉은색 흙인 석간주를 옻칠에 섞어 만들죠. 이외에 화학 안료와 섞어 흰색·감색·레몬색·청포도색·보라색 등 여러 색깔을 구현할 수 있어요.

이렇게 옻칠을 확보하면 각종 기물에 옻칠하여 만든 공예품인 칠기를 제작할 수 있어요. "칠기는 기물에 옻칠을 아주 얇게 여러 번 발라 만드는데, 장인들은 이를 '칠살이 오른다'라고 표현합니다. 여러 겹으로 칠한 옻칠은 속에서부터 천천히 마르기 때문에 전통 옻칠의 경우 완전 건조까지 거의 1년 정도 걸리기도 해요."

칠기를 제작할 때 뼈대가 되는 기물을 바탕이라 해요. 바탕의 재료는 나무를 많이 사용하지만, 나무 외에도 다양한 소재를 활용해요. 또 옻칠로 완성한 기물 바탕에는 여러 재료를 장식할 수 있죠. 57점의 표본이 담긴 기법상자를 통해 나무·금속·가죽 등 다양한 소재의 바탕을 활용한 칠기와 금박·나전·대모·칠화·난각 등 여러 칠기 장식 기법을 살펴봅시다.

나무(목심칠기)·도자기(도태칠기)·금속(금태칠기)·대나무(남태칠기)·가죽(피태칠기)·종이(지태칠기) 등 옻칠의 바탕은 여러 종류예요. 옻칠은 각 재료의 특성과 만나 각각 특색 있는 질감을 구현할 수 있으며, 옻칠이 각 재료의 약점을 보완하기도 합니다. 예를 들어 가죽 바탕에 옻칠을 하면 습기와 병충해에 약한 가죽의 단점을 보완할 수 있고, 금속에 칠을 하면 부식을 방지할 수 있어요. 기법상자에는 토기·금속·대나무 등 다양한 소재의 시편이 붙어있었는데요. 서로 다른 표면 질감에서 비롯되는 개성 강한 아름다움이 인상적이었죠. 또 뼛가루·황토가루·숯가루 등 다양한 재료로 만든 재와 옻칠을 혼합하면 기물 표면의 흠이나 나뭇결을 메우거나, 기물의 표면과 장식 사이의 틈을 채우는 효과가 있죠. 이러한 기법을 회칠이라 해요.

이렇게 옻칠과 회칠로 바탕을 완성하면 다양한 재료로 기물의 표면을 장식할 수 있어요. 앞서 얇고 판판하게 간 전복·조개 등 어패류의 껍질, 즉 자개를 바탕에 붙여 장식하는 나전칠기를 언급했는데요. 나전 역시 옻칠한 기물(칠기)을 장식하는 방법 중 하나로, 한국에서는 통일신라시대부터 확인되며 고려시대 본격적으로 제작돼 여러 기법이 발전했죠.

나전 외에도 옻칠한 바탕을 장식하는 기법은 종류가 다양해요. 먼저 금을 얇게 두드려 만든 박을 옻칠한 바탕에 붙여 장식하는 금박은 고려시대 이후 건칠한 불상에서 많이 보이는 기법이에요.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소장 중인 건칠보살좌상(乾漆菩薩坐像)이 좋은 예시인데요. 흙으로 빚어 소조상을 만든 뒤 그 위에 여러 겹의 천을 발라 옻칠하고, 옻칠이 굳어서 갑옷처럼 되면 소조상을 제거한 뒤 금박을 입히는 거죠.

바다거북의 일종인 대모(玳瑁)의 등딱지와 얇은 금속선을 옻칠한 바탕에 붙여 장식하는 기법은 각각 대모와 금속선이라 해요. 고려시대 불교 경전을 보관하는 함을 꾸밀 때 많이 사용했죠. 상어나 가오리의 가죽을 옻칠한 바탕에 붙여 장식하는 기법은 어피라 하는데, 어피가 질기고 내구성이 좋아 조선시대에 함이나 안경집·칼집을 만드는 데 사용했어요.

달걀 껍데기 조각을 옻칠한 바탕에 붙이는 기법은 난각이라 합니다. 근대 일본의 옻칠 공예가 마츠다 곤로쿠(1896~1986)가 사용하면서 성행한 기법으로, 현대 옻칠 작품에도 많이 사용하죠. "재료를 옻칠한 바탕에 붙이는 기법 외에, 옻칠에 안료를 섞어 만든 색칠로 바탕에 그림을 그려 장식하는 기법인 칠화(漆畫)도 있어요. 미국 호놀룰루 미술관이 소장 중인 '흑칠채화 모란문 가께수리'가 칠화로 제작한 대표적인 유물입니다."

옻칠은 방충·항균·방수 효과가 있기 때문에 현대에도 우리 생활 속 다양한 분야에 사용해요. 과거 한옥을 지을 때는 목재로 만든 부분에 옻칠을 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현대에도 한옥을 보수할 때 옻칠을 사용하죠. 이외에 항공·선박·자동차의 외장재 마감에 도료로 사용하며, 반상·의자·제기 등 일상생활에서 사용하는 물건 제작에도 쓰입니다.

지금까지 옻나무 한 그루가 칠기로 완성되기까지 과정과 옻칠 공예의 다양한 기법을 살펴봤는데요. 나전칠기 외에도 다양하고 아름다운 옻칠 공예의 세계가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죠. 또한 실용적이고도 아름다운 옻칠 공예품에는 여러 사람의 노력과 오랫동안 전승된 기술이 녹아있다는 사실도 배웠습니다. 우리 전통 공예에 담긴 깊이, 대단하지 않나요.

옻칠 주요 도구

글=성선해 기자 sung.sunhae@joongang.co.kr, 사진=서울공예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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