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상미의감성엽서] 사모님의 손길

2025-05-13

담양 ‘글을낳는집’에서 3~4월을 지내다 서울로 돌아왔다. 두 달 만의 귀가. 대강 집 청소를 하고 휴대폰에 저장된 사진들을 훑어본다. 휴대폰이 아주 오래된 것이라 지울 사진은 지우면서 용량 조절을 해야 하므로.

사방으로 둘러싸인 산 정경과 드넓은 논과 곳곳에 포진해 있는 개천과 저수지들, 명옥헌, 화순적벽, 운주사, 세량제 등 관광지 앞이나 예쁜 카페에서 찍은 사진들이 많다. 그래도 그곳에서 가장 좋았던 곳이 어디였냐고 묻는다면? 두말없이 그곳에서 매일매일 산책한 논두렁길과 그 길 끝에서 만나는 마을과 날마다 변하는 ‘글을낳는집’ 정원과 그 정원을 가꾸는 사모님(김선숙 여사님)의 ‘손’이었다고 말하고 싶다.

사모님의 손길 따라 자연의 순리대로 차례차례 싹이 트고 꽃이 피던 봄꽃들. 복수초와 크로커스, 봄까치, 민들레, 산수유, 깽깽이풀, 개나리, 진달래, 꽃잔디, 나팔수선화, 튤립, 히아신스, 명자꽃, 제주수선화 등에서 느꼈던 즐거움과 경이!

3월 초만 해도 겨울 정원이던 곳에 씨앗과 모종을 심고, 부엽토를 뿌리고, 흙을 갈아엎어 흙 모두에게 숨쉬기 운동을 시키시던 사모님. 나는 그 뒤를 졸졸 따라다니며, 흙 속에 묻혀 있던 여리고 가냘픈 생명들이 맥박을 파닥이며 흙을 뚫고 그 위로 방긋방긋 얼굴을 내밀 때마다 격한 경이의 감탄사를 난사했다. 폴 발레리가 “시는 감탄사의 발전”이라고 말한 그 감탄사로! 그러곤 봄꽃들과 함께 그동안 잊고 지낸 흙의 종류와 질감, 향기를 맘껏 맡았다.

“자신이 밟고 있는 흙이 얼마나 소중한지를 알려면 반드시 정원을 가져야 한다. 그것이 우표만 한 정원일지라도. 그러면 구름조차도 우리 발밑의 흙만큼 변화무쌍하지도 아름답지도 경외할 만하지도 않다는 것을 알게 된다”고 했던 체코 작가 카렐 차페크의 말처럼 새 생명이 흙을 뚫고 지상으로 나올 때마다 흙에 대한 무한한 존경심과 경외감이 샘솟아 내게도 이런 정원이 있었으면… 왠지 세상에서 가장 가엾은 사람이 우표만 한 정원도 없는, 흙을 만져볼 기회조차도 없는 사람들 같아서.

도취 없이 예술도 없듯이 그렇게 나는 두 달 내내 도취로 그곳을 헤매 다녔다. 산과 들, 논두렁길과 크고 작은 오솔길들을. 그리고 그곳에서 피고, 지고, 또 피는 꽃들과 갈색에서 연두와 초록으로 바뀌는 나무들의 멋진 행진을 보고 또 보았다. 그건 끊임없이 세상과 싸우다 지친 내 감각들을 달래주는 자연의 선물이었다.

세상에는 선하고 겸손하고 소박한 마음 씀으로 모든 것에, 설사 그게 절망이나 고통이라도 환하게 미소 짓는 사람들이 있다. 내겐 ‘글을낳는집’에서 만난 사모님이 그런 멋진 분인 듯하다. 대자연 속에서 자연스레 자연이 되어가는!

김상미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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