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에서 정수기를 쓴 지가 이제 곧 10년이 되어간다. 최근에는 미세플라스틱의 체내 축적 등 이슈로 플라스틱병에 담아 파는 생수를 사 마시기 꺼리는 분위기지만, 내가 첫 정수기를 집에 들였을 때만 해도 주변에서 그런 이야기는 잘 하지 않았다. 다만 언젠가 아는 선배가 도움을 주었으면 하는 사람이 있다고 해서 그가 알려준 번호로 전화를 걸어 설치 신청을 했던 것뿐이다.
그렇게 매달 정해진 요금을 결제하며 정수를 마시고 있다. 어차피 물을 사 먹게 된 세상인데 그 덕에 플라스틱 쓰레기도 덜 버리고, 미세플라스틱도 아마 조금 덜 먹고 있을 것이다.
첫날 나이 지긋한 남자가 기계의 배송과 설치를 위해 방문했고, 수년 뒤 좀 더 작은 기계로 교체했을 때를 제외하고는 매니저라는 명함을 들고 다니는 역시 나이 지긋한 여성이 분기에 한 번씩 집으로 와 기계 안 필터 청소와 교체를 해결해주고 간다. 1년에 네 번 아주 잠깐 보는 것뿐이지만, 서로 때를 맞춰 오래 얼굴을 보다 보니 나름 가까운 이웃이 됐다.
그는 텃밭을 가꾸는지 이따금 상추며 호박잎을 커다란 비닐봉지에 담아 건네곤 하는데, 내가 그것을 몇번이나 얻어먹었는지 정확히 기억하지 못하는 것처럼 그도 그 봉지를 들고 올 때마다 “젊은 사람이 이런 걸 드시나 모르겠네” 하며 같은 표정을 짓고는 한다. 나는 이제 더 이상 젊지 않다고 느끼는 바람에 가끔 서글퍼지는데, 매니저 선생으로선 나도 아직 젊디젊은 사람이다. 이토록 젊은 나는 선생이 그것들을 어디에서 어떻게 기르는지 알 도리가 없지만, 확실한 것은 그가 챙겨주는 채소가 스마트폰 애플리케이션으로 주문해 새벽에 받아먹는 친환경이니 유기농이니 딱지를 붙인 것들보다 훨씬 맛이 좋다는 것이다.
이번에 받은 청상추는 빳빳하니 씹는 맛이 있고, 붉은 기가 섞인 적상추는 부드러워 어금니에서 목으로 꿀꺽 넘기는 맛이 좋다. 호박잎은 찜기에 넣어 잠시 두었다 불을 끄고, 그 끓다 만 김으로 좀 더 익히다 얼른 꺼내 바로 식혀 손에 올려, 밥솥에 있는 콩밥을 퍼 반 술 정도 담고 쌈장을 간에 맞도록 얹은 뒤 손 아래 늘어진 넓적한 잎을 척척 덮어 입으로 넣었더니 그 맛이 어찌나 좋았는지 모른다.
이번 분기 관리를 끝낸 매니저는 내게 비닐봉지를 건넬 때와 같은 표정으로 새로 나온 정수기 모델의 이야기를 꺼냈다. 그가 설명한 새로운 필터며 그 정수 과정에 관한 이야기는 잘 이해하지 못했지만, 이번에 나온 제품은 매니저의 방문 없이 때가 되면 센터에서 택배로 보내는 필터를 받아 고객이 직접 교체할 수 있도록 설계했다는 것은 이해할 수 있었다.
사실 싱크대에 올려 쓰고 있는 기계가 얼마 전부터 하루에도 몇번씩 이유를 알 수 없는 소음을 내고 있어 적잖이 신경이 쓰이고, 예민한 작업을 할 때는 귀마개가 필요하기도 했다. 하지만 저 정수기에서 물이 끊기지 않는 이상 내가 매니저 선생의 방문이 필요 없다는 새 기계를 쓸 것 같지는 않다.
그것이 꼭 상추며 호박잎을 얻어먹고자 하려는 것만은 아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