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일 오후 2시 서울 영등포구 근로복지공단에서 만난 정향숙씨(49)는 손에 배인 땀을 연신 훔쳤다. 산업재해와 업무상 질병을 판단하는 업무상질병판정위원회가 정씨에 대한 심의·판정을 열기 전이었다. 판정 결과는 이날 결정된 뒤 1~2주 뒤에 정씨에게 통보될 예정이었다. 정씨의 손에는 전날 밤까지 고친 최후진술서가 들려 있었다. 초조한 표정의 정씨는 숨을 크게 내쉰 뒤 “저는 삼성반도체 기흥공장에 입사해 21년 간 근무했습니다”라는 문장으로 시작되는 진술서를 찬찬히 읽었다.

정씨는 만 열여덟 살이던 1994년 삼성전자 경기 기흥공장에 취업했다. 공장엔 정씨 또래의 여성들이 많았다. 회사는 “섬세한 여성의 손을 이용해야 한다”며 반도체 칩을 만들 때 사용하는 둥근 모양의 기판인 웨이퍼를 수작업으로 다루게 했다. ‘반도체 호황’을 맞은 공장에서 정씨의 몸은 쉴 틈이 없었다. 5kg 무게의 웨이퍼 박스 2~3개를 들고 나르는 동안 허리디스크가 생겼고 손가락이 휘었다. 만성적 생리통과 중이염에 수시로 병원에 가면서도 정씨는 허투루 일하지 않았다. 2015년 ‘희망퇴직’을 당했을 땐 “열심히 일한 사람을 이렇게 쫓아내나” 싶어 야속했지만 그래도 회사를 믿었다고 했다. “내게 무슨 일이 생기면 회사는 제대로 보상해줄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다.
정씨는 2022년 희귀질환인 ‘거대세포종’ 진단을 받았다. 2018년 자궁 적출 수술을 받은 지 4년 만이었다. 의사는 두개골 바닥에 종양이 생겼다고 말했다. 세 차례 수술을 받은 결과 종양은 제거됐지만 정씨는 왼쪽 청력과 얼굴 일부에 감각을 잃었다. “내 몸이 왜 이렇게 아플까.” 정씨의 머릿속에 21년간 몸담았던 공장이 스쳐지나갔다. 정씨의 눈·코·귀·입으로 들어왔던 각종 유기용제와 화학부산물들이 떠올랐다. 지난 세월 간 겪은 수많은 질병이 산업재해일 수도 있다는 생각에 다다른 정씨는 반도체 노동자 인권단체 ‘반올림’을 찾아갔다.

정씨는 “고 황유미씨 이후로 반도체 산업재해는 많이 사라진 줄만 알았다”고 말했다. 그런 정씨에게 반올림의 노무사는 반도체 산업재해 피해자 리스트를 보여줬다. 정씨와 같은 공장라인에서 일한 사람들의 이름이 보였다. 백혈병, 뇌종양, 피부암, 위암 등으로 사망한 사람, 정씨와 같은 거대세포종으로 사망한 사람도 있었다. 100만명당 1명꼴로 발생한다는 거대세포종을 진단받은 사람이 삼성반도체 공장에서만 정씨를 포함해 2명이 나온 셈이다. 정씨의 대리인인 이고은 노무사는 “기흥공장에서 반올림을 통해 산재를 신청한 사례만 46건이 있고, 정씨가 근무한 공장 6~9라인은 각종 희귀질환이 많이 발생한 라인”이라고 설명했다.
앞서 2018년 삼성전자는 기흥공장의 반도체·LCD 생산라인에서 1년 이상 일하다가 관련 질병을 얻은 피해자에게 2028년까지 보상하는 지원보상위원회를 구성했다. 2007년 기흥공장에서 일하던 고 황유미씨(당시 23세)가 급성 백혈병으로 사망한 이후 아버지 황상기씨가 싸워 회사와 합의해낸 결과다. 하지만 정씨는 지원보상위원회의 보상을 받을 수 없었다. ‘거대세포종’이라는 질병이 지원 대상에 포함돼 있지 않았다. 회사를 향한 믿음이 깨진 정씨는 그렇게 산업재해를 인정받기 위한 과정을 시작했다.

이날 업무상질병판정위원회에 선 정씨는 울음을 참고 발언을 이어갔다. 떨리는 목소리로 정씨가 말했다. “저는 (제 병에 대해) 어떤 과장도 원하지 않습니다. 다만 제 상태가 단지 ‘운’이나 ‘개인 탓’으로 치부되는 것이 억울합니다. 이 병은 제 오랜 근무의 결과입니다. 그 사실만은 꼭 인정받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