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0여 병 소장한 위스키장 공개 “100달러 넘는 건 사지 않는 주의”
‘애주가’ 정의를 새롭게 하는 위스키 마니아의 공간 공개

병에 독수리가 그려진 이글레어라는 버번위스키가 있다. 행사 때면 8만원대에 살 수 있다. 어느 날 남편이 이 술을 들고 온다. 밖에서 마시는 것도 모자라 감히 ‘양주’를 사들인다고? 시음용만큼 잔을 채운 남편이 말문을 연다. “스카치와 달리 숙성을 오래 하지 않는 버번치고는 꽤 고숙성이라 달콤함이 길고 날카로운 피니시가 매력적이지.” 여기서 그치면 하수다.
“왜 미국 육·해·공군 대령 계급장에 독수리가 들어가는지 알아? 장교 중 가장 높은 대령, 그 위는 장군 ‘스타’잖아. 독수리가 날 수 있는 하늘과 천상의 별이 존재하는 우주는 공간 자체가 달라. 하지만 모두가 별이 될 수는 없잖아. 군대나 기업을 불문하고 높은 곳에서 빛나는 별은 그들을 받쳐주는 현실의 기둥이 있기에 존재한다는 사실을 잊지 않아야 하지…”(박병진의 인터뷰 및 칼럼 재구성)

위스키 한 잔에 이 정도 스토리를 녹인다면, 기꺼이 시간과 공간을 내어줄 마음이 내키지 않을까. 덕분에 박병진 북스레브쿠헨·테일트리 코리아 대표는 거실 중앙에 위스키 수납장을 2개나 갖추고 있다. 집 안에 나만의 애착 공간이 생긴다는 것. 삶의 질을 높일 수 있는 적잖은 즐거움이다.
그와 일주일에 서너 번 위스키를 함께 마시는 술친구는 아내 나카가와 히데코다(그는 여러 요리책과 에세이로 잘 알려진 요리 연구가다. 지난 2017년 출간된 <히데코의 사계절 술안주: 冬 위스키 편>은 박 대표가 감수자로 참여한 합작품이었으며, 올 초 나온 <히데코의 일본 요리>는 박 대표의 출판사에서 출간한 첫 책이다).

술친구들이 하나둘 일신상의 이유로 음주 은퇴 선언을 하고, 종종 가던 식당의 소주값이 7000원으로 올랐을 때, ‘지속 가능한 음주 생활’을 고민하는 시점이 닥친다. 그대들이여 어떻게 마실 것인가. 지난달 17일 박 대표의 서울 연희동 집에서 답을 찾아보기로 했다.

IBM 등 국내외 기업 임원 및 CEO를 지낸 박 대표도 한때는 출장길 면세점에서 ‘발렌타인 17년산’을 사는 평범한 음주인이었다. 15년 전 뉴욕 파크애비뉴의 리커숍(주류전문점)에서 만난 “촌스럽지만 강렬한 디자인의 라벨”을 붙인 스카치 위스키 ‘아란’이 그를 위스키라는 블루오션으로 이끌었다. ‘위스키 이야기 없는 위스키 책’으로 입소문이 난 그의 책 <위스키, 스틸 영>은 스코틀랜드, 아일랜드, 일본, 미국 등의 증류소를 둘러본 탐방기다. 위스키 문외한도 술술 읽힌다.
“어마어마한 건 하나도 없어요. 100달러 넘는 위스키는 사지 말자는 주의거든요.
예전에 그 가격에 샀는데 비싸진 것들이 있긴 하죠.”

환영의 의미로 박 대표는 보관용 위스키장의 문을 활짝 열어젖혔다. 가장 비싼 위스키부터 찾는 질문에 그는 “발렌타인 30년 같은 건 선물받은 거고, 옛날에 사둔 맥캘란이 지금은 6개 세트에 1000만원 정도 할 거”라더니 개인이 술을 재판매하는 것은 불법이라고 하더니 “하여튼 내가 다 먹을 것”이라고 못 박았다. 이어 그가 들어 보인 위스키는 아이리시 블렌디드 위스키 ‘패디’였다.
“아이리시 위스키는 세 번 증류해서 부드러워요. 목 넘김과 향이 좋죠. 한국 사람들에게 익숙한 윈저, 임페리얼, 딤플 등이 블렌디드 위스키인데 거기 들어간 싱글몰트가 아일랜드에서 가까운 스코틀랜드 남쪽 지방 위스키가 많아요. 거기도 세 번 증류하거든요. 이 패디는 100주년 기념으로 나온 건데, 후쿠오카에서 몇천엔 안 주고 샀어요.”

위스키는 주로 국내외 리커숍에서 산다. 면세점은 “뻔한 것밖에 안 팔아서” 즐겨 찾지 않는다. 예전에는 남대문 수입상가도 갔는데 요즘은 대형마트나 편의점 제품군도 괜찮다. 그가 즐겨 마시는 위스키라며 꺼내놓은 제임슨, 킬베간, 맥코넬스를 비롯해 “글이 잘 안 써질 때 마신다”는 라이터스 티어즈(Writers’ Tears) 등은 3만~10만원대 미만으로 어렵지 않게 구입할 수 있다. 당장 마시지 않을 위스키는 박스에 담아 보관하는데, 가격을 기억하기 좋게 영수증도 함께 챙겨둔다.

총 300여병의 소장 위스키 중 고가의 제품보다 그의 편애를 받는 건 로열층에 자리 잡은 아드벡 시리즈인 듯했다. 1998년 스코틀랜드의 위스키 아드벡을 인수한 루이비통모에헤네시(LVMH)는 브랜드의 대중화를 위해 10년 프로젝트를 기획했다. 그해 증류한 위스키를 숙성해 2004년 여섯 살짜리 ‘베리 영’을 내놓고, 2년 후 여덟 살짜리 ‘스틸 영’, 1년 후 아홉 살짜리 ‘올모스트 데어’, 그리고 2008년 열 살짜리 ‘아드벡 르네상스’를 출시했다. 박 대표의 책 제목도 여기서 따왔다.
“완성형이 아니라, 인생의 80% 정도가 찰랑찰랑 채워져 있을 때가 가장 옵티멀(최적화)한 때가 아닌가 싶어서요. 그러니까 80% 채워진 상태에서 새로운 목표를 세우고
거기서부터 ‘베리 영’으로 시작해 ‘올모스트 데어’까지 노력해보자는 의미죠.”

‘중년 위스키 스토리텔러’가 사랑하는 또 다른 위스키를 소개하려면 1914년 남극 횡단에 나섰던 영국의 전설적인 탐험가 어니스트 섀클턴부터 알아야 한다. 좌초와 표류 등 고난을 헤치고 펭귄을 잡아먹으며 634일 만에 전 대원과 무사귀환한 그의 여정은 책으로 출간돼 리더십 필독서로 읽힌다. 그 당시 남극 베이스캠프에 묻혔다가 100년 만에 온전히 발견된 위스키의 레시피를 복원해 만든 위스키가 ‘섀클턴’이다. 마니아들은 남극 대륙 라벨이 붙은 이 위스키를 얼려두었다가 마시며 역사까지 음미한다. 5만원의 행복이다.
“엄혹한 상황에서도 진짜 희망을 잃지 않도록 용기를 북돋아 주는 것, 그게 리더의 역할 아닐까요. 기업체 강연에서 이 얘기하면 되게 좋아하세요. 이런 얘기는 끝도 없죠.”

30년 직장 생활을 접고 스타트업 대표가 된 그의 또 다른 직함은 광화문살롱 위스키 최고위 과정 교수다. 강의 경력만 10년이 넘었다. 누룩으로 빚어내 일본에서는 위스키라 불리지 못하는 바람에 미국땅에서 어렵게 구할 수 있었던 다카미네 위스키, 충주의 오크통에서 익어가고 있는 ‘코리아 라이스 위스키’ 마한 오크를 이야기할 때는 ‘업계 사람’ 특유의 안타까움과 자부심이 실렸다.
또한 오크통 단위로 위스키를 공동구매한 뒤 캘리그래퍼를 직접 섭외해 만든 라벨까지 붙여서 공유하고, 직접 맛을 봐가며 나만의 위스키를 조제해 블렌디드 위스키를 만들어 온 무용담을 들으면 애주가의 범주에 단지 마셔서 없애는 자는 낄 수조차 없겠다 싶다.

“하늘에서 천사가 하프를 켜는 맛이라고 술맛을 표현하기도 하는데, 전 그런 거 몰라요. 술맛에 관해서는 얘기하지 않거든요. 다만 술을 만드는 사람들과 그 술이 어떤 배경을 가졌는지 지리와 역사에 대해 즐겁게 이야기하는 것! 그게 제가 원하는 거예요.
그러기 위해서는 인문학적인 소양이 있어야 하고, 먼저 인간이 되어야죠.
왕도가 있나요?”

멀리 남산 N타워가 보이는 그의 서재 겸 홈오피스에는 중년의 로망이 곳곳에 담겨 있었다. 오래돼 알코올이 다 증발한 ‘에인절스 셰어’ 흔적만 남은 1980년대의 미니어처 위스키병, 케네디 하프 달러 동전을 받침으로 특별 제작해 단골 바에도 구비해 둔 위스키 잔, 꼼꼼히 메모해가며 읽은 책, 손때 묻은 카메라 등이 저마다의 사연을 쏟아냈다.

그러고 보니 1시간40분 남짓 그의 집에 머무는 동안 한시도 엉덩이를 붙이고 앉지 않았다. 그의 ‘홈 위스키 투어’가 재밌기도 했지만, 왜 버번위스키 중에는 각진 병이 많은지(금주법 시대에 소리 나지 않게 몰래 옮기기 위한 물류 효율화를 위한 것이라고 한다), 굳이 위스키 전용 테이스팅 글라스, 글랜캐런 잔을 고집하지 않아도 되는지(되도록 스템이라 불리는 다리가 있는 잔이 좋단다), 위스키에 물을 한 방울 떨어뜨리면 액체의 표면장력이 해체되면서 향이 진해지는 걸 느낄 수 있다든지 등 ‘팁’에 솔깃하다 보면 도낏자루 썩는 줄 모를 만했기 때문이다. 그의 집을 서둘러 나올 수밖에 없었던 이유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