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걸어서 역사 속으로 - 왕의 길을 걷다] (12)창경궁 탐방기

2025-10-28

조선의 영광과 상처, 그리고 민족의 각성

창경궁, 조선의 슬픔에서 민족의 각성으로

왕의 정원에서 저항의 궁궐로

정조의 한양아틀라스와 항일 독립전쟁기

#왕의 정원에서 민초의 궁궐로-윤재민

창경궁은 조선 제9대 임금 성종 14년(1483년)에 창덕궁 동쪽에 건립된 궁궐이다.

성종은 세 명의 대비(정희왕후, 안순왕후, 소혜왕후)를 봉양하기 위해 궁궐을 지었고, 그 이름을 ‘창경(昌慶)’이라 했다. 이는 나라가 창성하고 경사가 일어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창경궁은 조선 궁궐 가운데 유일하게 ‘왕의 효심’이 건축으로 구현된 궁궐이었다.

그러나 이후 1592년 임진왜란 때 대부분의 건물이 불타 사라졌고, 광해군과 숙종, 정조 대를 거치며 여러 차례 복원과 재건이 이루어졌다.

창경궁의 건축미는 단순한 웅장함보다 인간의 감정과 자연의 흐름을 담은 절제미에 있다.

후원과 연못, 정전(正殿)과 편전(便殿)이 자연의 지형을 따라 유기적으로 배치되어 있으며, 왕실의 권위보다 ‘자연 속의 조화’를 중시했다.

이는 성리학의 예(禮) 정신과 유교적 미학이 건축으로 형상화된 결과였다.

그러나 조선 후기 이후 창경궁은 불운의 역사를 맞이했다.

화재와 전쟁, 정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수차례 훼손되었고, 복원과 재건이 반복되었다.

그럼에도 조선 왕들은 궁궐의 형태를 복원하는 일을 결코 멈추지 않았다.

이는 건물을 다시 짓는 행위가 아니라, 나라의 기운을 되살리고 왕조의 정신을 재건하려는 상징적 복원이었다.

창경궁의 전각마다 깃든 돌과 목재, 기와 하나하나에는 백성들의 노동과 민족혼의 의지가 함께 새겨져 있다.

#영조와 사도세자의 죽음-김세용

창경궁은 조선 왕실의 영광과 함께 왕가의 비극을 품은 궁궐이기도 하다.

영조 38년(1762년) 윤5월, 왕세자 사도(思悼)는 창경궁 선희궁 부근의 뒤주 속에서 생을 마감했다.

조선의 역사에서 가장 비극적인 사건으로 기록된 이 일은, 단지 부자간의 갈등뿐만이 아니라 왕권과 신권등 조선 붕당정치의 모순이 응축된 비극이었다.

사도세자는 감성이 풍부하고 예술적 재능이 뛰어났으나, 붕당정치의 모순 속에서 점차 고립되었고 일상에서도 일탈 된 행동이 잦았다.

영조는 학문과 예를 중시한 군주였지만, 대신들의 정쟁과 정치적 불안 속에서 아들을 불신하게 된다.

결국 영조는 아들을 뒤주에 가두어 8일 만에 죽음에 이르게 했고, 창경궁은 그날 이후 조선 왕실의 슬픔이 깃든 장소가 되었다.

이 사건은 ‘부자간의 참극’으로만 볼 수 없다.

조선 사회의 붕당정치가 낳은 구조적 비극이었으며, 권력이 인간의 윤리와 도리를 압도한 순간이었다.

사도세자의 죽음은 조선 왕조의 권위에 깊은 상처를 남겼으며, 이후 정조의 즉위에 이르기까지‘윤리의 모순 및 정치와 인간의 타협과 화해’라는 숙제를 남겼다.

창경궁은 그날의 비극을 기억하는 조선 정치의 거울로 남아 있다.

#창경원으로의 격하. 일본의 침략과 문화말살-황세현

1911년, 일제는 조선 왕실의 궁궐이던 창경궁을 ‘창경원(昌慶苑)’으로 이름을 바꾸고, 그 안에 동물원과 식물원을 조성했다.

이는 조선의 전통과 왕실의 권위를 철저히 파괴하려는 정치적 상징 조작이었다.

왕의 정원이었던 궁궐이 일본인과 외국인 관광객의 유희장이 되었고,

조선의 백성들은 입장료를 내고 자신들의 역사를‘관람’해야 했다.

창경궁의 전각들은 훼손되고, 건축적 위상은 철저히 유린되었다.

명정전 일대는 박람회장처럼 꾸며졌으며 궁궐의 정원은 일본식 조경으로 바뀌었고 동물원이 되었다.

이는 민족 정체성의 해체를 목표로 한 식민정책이요 고도의 문화 말살 심리전이었다.

우리의 고궁의 형태는 비록 일본에 의해 처절하게 망가졌지만, 다행스럽게도 창경궁의 민족정신만은 완전히 무너지지 않았다.

돌담길과 전각의 흔적 속에서 사람들은 여전히 우리의 기억을 찾았다.

왕조의 상징이던 궁궐은 역설적으로 민족의 자존과 저항의 상징이 되었다.

식민지의 중심에서조차, 이 궁궐은 ‘우리가 누구인가’를 묻는 역사적 증언으로 남았다.

#정조의 개혁정치 ‘한양 아틀라스’를 꿈꾸다- 백승기

정조(正祖, 재위 1776~1800)는 조선 후기 가장 개혁적이고 사상적인 군주였다.

그는 즉위와 동시에 아버지 사도세자의 억울함을 풀고, 조선 사회의 붕당정치를 바로잡겠다는 결단을 내렸다.

정조는 창경궁을 조선의 사상과 행정, 그리고 학문의 중심으로 재편하며 개혁 정치의 중심무대로 삼았다.

규장각을 설치해 젊은 학자들을 육성하였고, 탕평책을 강화해 당파의 벽을 허물었다.

그는 유교적 도덕과 실용적 행정을 결합하여 국가 운영의 효율성을 높였다.

그리고 수원 화성의 축성, 장용영의 창설, 신분제의 완화, 서민경제 안정정책 등은 모두 근대적 행정개혁의 초석이었다.

이러한 정조의 정책은 단지 왕조의 르네상스적 부활이 아닌, 조선식‘한양 아틀라스’를 구축하여 개혁정치의 위대한 시대를 열고자 했다.

그는 조선이라는 무거운 짐을 짊어지고 신하들과 새 세상을 열겠다는 사명으로 개혁을 단행했다.

신하들이 붕당에 얽매여 흔들릴 때도, 정조는 다산 정약용 등 젊은 신하들과 함께 개혁의 일념으로 조선의 역사를 지탱했다.

아틀라스가 하늘을 떠받치듯, 정조는 조선의 사상과 정의를 온몸으로 떠받치며 개혁의 선봉에 있었다.

그에게 창경궁은 부친의 넋을 위로하는 공간이자, 조선을 짊어진 젊은 철학군주의 궁궐이었다.

■‘일제시대’가 아닌 ‘항일독립전쟁기’라 불러야 -백승기

우리는 흔히 1910년 한일강제병합 이후 1945년 광복까지의 36년을 ‘일제시대’ 혹은 ‘일제강점기’라고 부른다.

그러나 이는 식민 통치의 시각에서 만들어진 표현이며, 피지배의 프레임을 그대로 답습하는 식민사관의 언어다.

그 시기는 역사의‘정복시대’가 아니라, 자주적 독립을 위해 민족이 전방위적으로 항거한 독립전쟁의 기간이었다. 1945년은 안중근 장군, 윤봉길 의사, 김좌진 장군, 홍범도 장군, 김구 선생님 등 수많은 독립운동가의 숭고한 피로서 쟁취한 위대한 대한의 독립이요 광복이다.

역사 용어는 사전적 단어가 아니라 기억의 틀이다.

우리가 그 시기를 ‘항일 독립전쟁기’로 바꿔 부르는 순간, 피해의 역사가 자주적 저항의 역사로 바뀐다.

실제로 고려 시대에도 몽골의 침략에 맞서 39년간(1231~1270) 싸운 시기를 우리는 ‘대몽항쟁기’라 부른다.

그렇다면 조선과 대한제국이 일제의 무력에 맞서 싸운 36년 또한‘항일 독립전쟁기’라 부르는 것이 역사적으로 더 정확하고 마땅한 일이다.

이제 창경궁은 그 언어적 각성의 상징이 되어야 한다.

일제가 짓밟은 공간이었으나, 해방 이후 복원되며 ‘궁궐’의 이름을 되찾았다.

그 복원은 건축의 회복만이 아니라 민족혼의 시대적 복권이었다.

이제 우리는 역사 용어 하나에도 주체의식을 담아야 한다.

‘일제시대’라는 말 대신 ‘항일독립전쟁기’라 부르는 일

그것이 곧 역사 인식의 주체적 독립이자 언어의 해방이다.

창경궁의 정원을 걷는 순간, 우리는 과거의 궁궐을 보는 것이 아니다.

그 길 위에서 역사의 주어가 다시 ‘우리’임을 확인하는 일이다.

역사의 주인으로 밀린 숙제는 하고 놀자.

서울=이방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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