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태우 비사
3부. 노태우의 승부수 ‘3당 통합’
3회. 김대중 끌어안은 노태우의 ‘중간평가 유보’

1989년 3월 7일 노태우 대통령이 청와대에서 김종필 공화당 총재와의 단독회담에서 ‘합당 원칙’에 합의하면서 각각 밀사를 1명씩 지명해 후속 논의를 맡기기로 했다. 김종필은 김용환 정책위의장, 노태우는 홍성철 비서실장에게 밀명을 맡겼다. 그런데 당시 노태우 대통령은 홍성철 외에 박철언 정책보좌관에게 극비 회담 결과를 따로 설명해주었다. 박철언이 6공 정계개편의 책임 디자이너였기 때문이다.
‘6공 황태자’ 박철언의 그랜드 디자인
사실 홍성철은 김종필 주장대로 “당장 공화당과 합당하자”는 입장이었다. 홍성철은 이북 출신으로 한국전쟁 당시 해병대로 참전한 예비역 대령이며, 박정희 시절 청와대 정무비서관과 내무부 장관을 역임했다. 경력만큼 생각도 김종필과 비슷했다.
그러나 박철언의 생각은 달랐다. 노태우는 김종필과 단독회담이 끝난 그날 밤 박철언을 청와대로 불러 “김종필은 아무 때나 합당해도 좋다더라”고 설명해 주었다. 박철언이 심드렁하게 대답했다.
“서두를 것 없습니다. 공화당이야 어차피 우리 쪽이니까. 일단 카드로 확보해 두고 다른 당과의 대(大)합당을 모색해야 합니다.”
박철언이 얘기하는 ‘대합당’은 3김씨 모두와의 합당, 즉 ‘4당 합당’이었다. 나름 논리적 근거가 분명했다.
‘공화당과만 합당하면 수구 보수(공화당)와 군부 세력(민정당)의 결합’이라는 시대역행적 이미지로 비춰진다. 더욱이 그럴 경우 김대중(평민당)과 김영삼(민주당)의 합당을 촉발할 수 있다. 그럴 경우 공화당과 합당한 다음 사안별로 평민당이나 민주당과 협력한다는 정책연합은 불가능하다.’
‘4당 합당’은 박철언이 그리던 그랜드 디자인이었다. 너무 이상적이고 자기중심적이었다. 박철언 측근의 설명.
“박철언이 총선 패배 이후 ‘정국 안정 방안이 필요하다’는 대통령의 얘기를 듣고 나름대로 밑그림을 그렸죠. 그가 일찍부터 주장해온 3단계 정계개편 구상입니다.”
1단계 민주화, 2단계 민족화합, 3단계 민족통일이다. 1단계(민주화)는 6·29 선언과 노태우의 대통령 당선으로 완성됐다. 2단계(민족화합)는 내각제 개헌과 정계개편이다. 민족화합은 곧 ‘지역감정 해소’를 의미한다. 즉 경상도 정권(노태우)과 소외된 호남(김대중)의 결합이다. 평민당과 정책연합, 나아가 4당 합당이 그 완성이다. 박철언이 동교동(김대중)에 공을 많이 들인 이유다.
마지막 3단계(민족통일)는 남북관계 개선, 북방정책의 성공이다. 박철언은 5공 시절 장세동 안기부장 특보로 북한 관련 메신저 역할을 맡은 이후 정치인(국회의원)으로 변신하면서도 북방 관련 업무를 놓지 않았다. 이는 대권 후계 구도와 연관돼 있다. 3김 시대를 청산하고 ‘통일세대’가 국정을 맡아야 한다는 것이다. 물론 통일세대의 지도자는 박철언 본인이었다.
세대 교체의 비방은 내각제다. 내각제의 경우 총리의 임기가 정해져 있지 않다. 대권에 평생을 바쳐온 ‘대통령병 환자’ 김씨들을 ‘단명 총리’로 잠깐씩 권력 정상의 맛만 보여주고 갈아치우면 된다. 박철언은 자신의 그랜드 디자인이 “1987년 대통령 선거과정에서 시작됐다”고 설명했다. 대선 과정에서 사조직(월계수회)을 총괄 지휘하면서 선거의 혼탁상을 현장 확인했고, 더 이상 안되겠다는 결심에서 ‘내각제 개헌’을 생각했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