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통령의 고대사 관심이 진심이라면 [목요일 아침에]

2025-12-17

2023년 9월 17일 경남 합천 가야고분군이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됐다. 이런 천금 같은 기회가 자칫 일부 강성 재야 연구자와 시민단체들의 친일 몰이로 무산될 뻔했다. 이들은 합천군과 우리 사학계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등재를 신청하면서 가야 제국(諸國·여러 나라) 중 ‘다라국(多羅國)’ ‘기문국(己汶國)’ 등의 명칭을 넣은 점을 시빗거리로 삼았다. 왜 우리 역사서가 아닌 일본 사료의 내용을 인용했느냐는 식의 주장이었다.

다라국이라는 명칭은 일본 고대 역사서인 일본서기뿐 아니라 중국 사료인 양직공도(梁職貢圖)에도 등장한다. 기문이라는 이름 역시 일본 측 기록만이 아니라 우리 측 삼국사기에도 명시돼 있다. 그런데도 국수주의 성향의 일부 재야 역사 연구자들과 시민운동가들은 해당 명칭들이 ‘일본서기’에 적힌 점만을 부각하면서 일제 식민주의 역사관, 반민족적 행태라는 식으로 비난하고 여론전을 폈다. 압박을 느낀 우리 관계 당국은 기문국과 다라국은 제외한 가야 기록만을 유네스코에 등재해야 했다.

일부 재야 단체들의 발목 잡기는 한반도 및 동북아시아를 둘러싼 고대사 연구 관련 국책 사업마다 반복돼왔다. 전남과 전북·광주시 등 3개 지방자치단체는 1000년의 전라도 역사를 1만 3000여 쪽에 달하는 방대한 역사서로 편찬하는 사업을 2018년부터 추진했다. 한데 해당 문헌에도 전남 남원 일대에 기문국이 존재했다는 취지의 내용이 들어가자 재야 연구자들이 문제를 삼았다. 결국 당국이 24억 원을 들여 인쇄한 ‘전라도 천년사’ 간행물은 대중에게 배포조차 되지 못하고 있다.

재야 강성 역사 운동가들은 극단적 국수주의 성향을 보여왔다. 단일민족 사상에 과도하게 몰입해 고조선 시대를 지나치게 미화했다. 대표적 단체가 1975년 창설된 ‘우리국사찾기협의회’다. 협의회 부회장직은 재야 역사 연구자 고(故) 문정창 씨와 유학자 고 이유립 씨 등이 맡았다. 이들은 상고시대 우리 민족이 중원과 유럽 등까지 제패했다는 주장을 폈다. 그런 흐름 속에서 이 씨가 1979년 우리 민족 고대사 관련 내용을 서술한 ‘환단고기’를 출간했는데 정통 사학계는 ‘위서(僞書)’로 판정하며 사이비 역사관에 맞서느라 고군분투해왔다.

이재명 대통령이 이달 12일 교육부 업무보고를 받으면서 돌연 ‘환단고기’를 언급했다. 박지향 동북아역사재단 이사장에게는 “환단고기는 문헌이 아니냐”고 물었다. 동북아역사재단은 중국의 동북공정에 맞서 우리 고대사를 정립하기 위해 노무현 정부 시절 창설된 공공 연구기관이다. 역사 왜곡에 맞서온 기관에 대해 국가 지도자가 위서를 언급하며 ‘문헌’인지 여부를 질의하는 것은 참담한 일이다. 논란이 커지자 대통령실은 “우리가 (한반도의) 고대사나 상고사에 대한 연구가 적지 않느냐”며 “그런 부분에 관심을 가지라는 이야기”라고 해명했다.

우리 고대사에 대한 이 대통령의 관심이 진심이라면 제도권 사학자들이 보다 활발하게 연구할 수 있도록 물적·인적 지원에 나서야 한다. 2026년도 정부 예산안에서 동북아역사재단 사업비에 대한 지원 예산은 올해보다 10.8%(7억 1200만 원) 삭감 편성됐다. 중국·북한과의 관계 경색도 고구려·발해 유적 등의 공동 조사에 어려움을 주고 있다. 과거 노무현 전 대통령은 동북공정 문제가 터지자 2004년 한중 정상회담에서 직접 의제로 삼아 문제를 지적해 중국 정부로부터 ‘고구려사 문제의 공정한 해결을 도모한다’는 취지의 구두 합의를 이끌어냈다. 이후 한중 간 고대사 학술 토론이 활발히 이어지다가 2017년 주한미군 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THAAD·사드) 배치 이후 뜸해졌다. 우리 사학자들이 중국을 방문하면 공항에서부터 장시간 제지당하거나 방중 내내 공안 당국자의 감시를 받는다고 한다. 앞서 남북 간에도 고려 왕궁이었던 만월대 발굴 조사를 성공적으로 이뤄냈으나 아직 미발굴 부분이 남아 있다.

마침 이 대통령이 지난달 한중 정상회담에서 양국 관계의 전면적 복원에 합의했다. 정부는 이를 계기로 중국 당국과 협의해 고대사 연구 협력 사업을 되살려야 한다. 통일부도 남북 고구려 유적 조사 재개를 더 적극적으로 추진할 필요가 있다. 북한의 경제 여건상 확보하기 어려운 고가의 고고학 발굴 장비와 기술 등을 지원해 공동 고대사 연구를 재개한다면 한반도 긴장 완화 효과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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