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부의 여름나기

2025-06-09

고권일, 농업인·수필가

시나브로 더위가 시작됐다.

제발 올여름은 폭염 없이 지나기를 빌어 보지만, 계엄군처럼 몰려드는 무더위는 온전히 하늘의 재량에 맡길 수밖에 없다. 지구촌 곳곳마다 고온(高溫)으로 인한 농작물 피해 늘어가지만, 여태 뾰족한 해결방안 없기에, 부질없이 던지는 시골 농부의 넋두리이다.

고온에 장사인 농작물은 없겠지만, 비닐하우스 감귤은 유별나게 취약하다. 때문에 요즘처럼 일교차가 심한 환절기에는 한낮 고온 때문에 한 시도 긴장감을 늧출 수 없다. 하우스 안 적정온도에 따라, 천장을 여닫아 줘야 하기 때문이다. 미리 입력한 적정온도에 따라 여닫히는 자동 개폐장치 있지만, 예고없는 정전이나 자체 기계장치 고장에는 속수무책이다.

이런 이유로 하우스 감귤농가들은, 초여름부터 선선한 바람 불어오는 가을까지, 꼼짝달싹을 못한다. 더구나 이 시기는 연례행사처럼 엄습하는 태풍 가능성도 매우 높기 때문이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늘그막에 경제적 여유도 생기고, 무엇보다 무릎 성할 때 난생처음 부부동반 나들이를 다녀올 생각이 굴뚝같지만, 해외는 물론, 당일치기 국내여행도 언감생심이다.

노심초사한 공덕(功德)으로 대부분 농가가 고온피해를 벗어나지만, 한 순간 방심으로 농사를 망쳐버리는 이웃들도 적지 않다. 올해는 이웃사촌 동생이 그런 ‘천붕’(天崩)의 변고를 당했다.

해녀인 제수가 물질 나가면서, 오전 10시와 오후 2시 전후에는 하우스 지붕이 올라갔는지를 점검하라고 신신당부를 했다고 한다. 그런데, 동생도 자기 일에 바빠 미처 살펴 보지를 못했다. 결국 물질 끝낸 제수가 농장에 가보니, 하우스 안은 찜통이었고, 아침까지만 해도 탱글탱글 열매기 달렸던 한라봉 나무들이 시름시름 시들어 널부러져 있었던 것이다. 개폐장치 고장으로 하우스가 열리지 않아, 초여름 고온에 나무들이 고사 위기를 맞은 것이었다.

망연자실한 부부와 함께 억장이 무너졌지만, 어떤 도움도 줄 수 없었다. 올해 농사는 포기하고, 시든 나무를 되살려 내년을 기약할 수밖에 어쩔 도리가 없기 때문이다.

아직 여름 초엽인데 더위가 예사롭지 않다. 벌써부터 열과 피해가 걱정이다. 작년에는 레드향 감귤이 열과 폭탄을 맞아, 일년 농사 폭삭 망했다. 수확을 앞뒀던 열매들이 껍질이 깨지면서 떨어져 나가버린 것이다. 충격에 빠진 농가 중에는 올봄에 눈물 머금고, 레드향 성목들을 잘라내, 대체 품종들로 작목을 전환했다. 따라해 볼까하는 마음도 없지 않았지만, 칠순 나이를 생각해서 단념했다.

제발 올여름은 무더위가 기승부리지 말고, 너무 늦지 않게 가을 저편으로 사뿐히 건너 가기를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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