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식좌 김구, 양식당 디너 파티…“형님” 벌떡 일어나 맞은 사람

2025-12-14

모던 경성, 웨이터 50년

한반도가 빛을 되찾은 광복(光復) 후 혼란한 정국 속 두 거물, 백범 김구 선생과 이승만 전 대통령. 두 사람이 머리를 맞댄 곳은 어디였을까요. 서울의 한 양식당, 미장 그릴이라는 곳입니다. 한국인 1세대 웨이터인 이중일씨가 차린 이곳은 해방 후 정계의 사랑방이었습니다.

몽양 여운형 선생부터 윤보선 전 대통령 등 당시 한반도의 미래를 그리던 이들이 때론 밀담을 나누고 때론 목소리 높여 논쟁하던 곳이었지요. 한반도 현대사가 시작된 곳 중 하나가 미장 그릴이었던 셈입니다. 이중일씨가 1971년 중앙일보 ‘남기고 싶은 이야기’에 그 당시 상황을 생생히 기록해 놓았습니다. 해방 뒤 정국의 현장으로 함께 가보시지요.

사실 확인을 위해 다양한 관련 서적과 사료를 참고했습니다. 보완해 추가한 내용은 파란색으로 표시했습니다. 참고문헌 목록은 기사 끝에 적시했습니다. 일본 자료들도 탐색해 보니, ‘서울의 휴일’이라는 1956년작 영화 속 미장 그릴의 모습도 발굴할 수 있었습니다.

기사를 ‘듣고’ 싶으신 분들을 위해 변사 스타일의 오디오로 이중일씨 이야기를 읽어드리는 서비스도 마련했어요. 구글AI 스튜디오로 생성했습니다. 기사 중간에 있는 오디오 버튼을 살짝 눌러 주세요.

이번 주, 이중일씨의 이야기 코스, 시작합니다.

모던 경성 웨이터 50년⑪ 해방 후 연 레스토랑, 정계 사랑방이 되다

중앙일보 1971년 3월 9일자

나는 철마 위에서 해방을 맞았다. 열차 식당의 헤드 웨이터로 만주와 부산·서울·청진을 오르내리면서 나라 잃은 설움을 느끼고 일본 제국주의의 횡포를 목도하던 때였다. 해방 소식을 들은 것은 대전역이었다. 그 순간, 여러 추억이 주마등처럼 머리를 스쳤다. 만주사변이 나서 어수선할 때 모험을 무릅쓰고 중국으로 돈벌이에 나섰던 일, 베를린 올림픽에 출전하는 일본 대표단을 태우고 부산에서 만주 국경 도시까지 달렸던 일 등. 일장기를 달아야 했던 손기정 선수에 얽힌 일화도 있었다.

한국인 최초로 자랑스럽게 올림픽 금메달을 목에 걸었던 손기정 선수의 사진을 당시 국내 신문들은 그대로 싣지 않았다. 승리의 기쁨에도 불구하고 가슴에 단 일장기에 시무룩한 표정이던 손 선수의 사진을 1면에 게재하면서, 일장기를 지워버린 것이다. 특정매체만이 아닌 조선중앙일보와 동아일보 등 여러 매체가 그러했다. 마지막 자존심이었을 터다.

일장기 삭제 사건의 주인공 중 한 명이 동아일보 체육부 이길용 기자였는데, 그와 열차 식당에서 만나곤 했던 기억이 소중하다. 사이다로 목을 축이며 서로를 격려하던 일이 생생하지만 이젠, 먼 과거의 일로 묻혀버린 그 추억들.

9월 10일에 사표를 냈다. “천지가 바뀌었는데 내가 또 보이(웨이터) 질을 하겠는가”라고 자문도 했지만, 결국 내 천직은 양식 인구에 봉사하는 것임을 깨달았다. 그리고 그해 11월 서울 다동에 문을 연 것이 미장 그릴이라는 식당이었다.

20년이나 몸에 밴 서비스가 내 무형의 재산이었다. 당시 양식만 취급하던 그릴 식당은 우리 미장 그릴과 수도 그릴(옛 치요다 그릴) 정도였다. 조선호텔과 반도호텔에도 있었지만 미 군정청에서 독점했다. 미장은 당시 한민당 인사들의 본거지였을 뿐더러, 미 군정하의 정치 집회소 같은 인상을 줄만큼 정치인들의 왕래가 많았다. 김구ㆍ김성수ㆍ이범석ㆍ여운형ㆍ신익희ㆍ윤보선ㆍ허정ㆍ김준연ㆍ조병옥ㆍ장택상ㆍ윤치영씨의 출입이 누구보다도 빈번했다.

별실은 한국민주당(한민당)이 아예 독점하다시피 했다. 특히 첫 내각의 조각을 하는 본부 역할을 했다. 연일 회담이 열렸다. 한구석에선 식탁을 치며 고함 소리를 내는 이가 있는가 하면, 다른 쪽에선 쥐죽은 듯한 밀담이 흐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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