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산책] 점점 작아지는 예술감상

2025-05-09

세상이 변하면서 예술작품 감상의 방식도 크게 바뀌었다.

예를 들어, 요새는 음악을 듣기보다 보게 된다. 유튜브 탓이다. 연주하는 오케스트라, 독주자, 지휘자의 모습을 보면서 듣는다. 그렇게 감상하면서 어쩐지 음악에 미안해진다. 멋지게 표현하면, 시청각 입체적 감상이지만, 음악의 본질인 소리에 집중하고 몰입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시각적 요소가 중요해지다 보니, 연주자의 패션이나 지휘자의 몸동작 같은 2차적인 것이 화제가 되기도 한다. 가령, 최소한의 옷만 입고 피아노 건반을 두들기는 유자왕이나 기도 드리듯 눈감고 지휘하는 카라얀 선생, 춤추듯 온몸을 휘두르는 지휘자 카를로스 클라이버….

음악만 그런 것이 아니다. 유튜브나 휴대전화기 덕에 많은 것이 크게 바뀌었다. 글은 자꾸만 짧아져만 가고, 미술작품은 영상을 통해 축소판으로 보고 감상했다고 착각한다. 이건, 대형영화를 작게 축소해서 손바닥에 놓고 보거나, 음악을 연주회에서 듣지 않고 기계로 듣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문제다.

미술에서 작품의 크기나 질감은 결정적 조형요소다. 무엇을 그렸고, 무슨 말을 하려는가 만큼 중요한 부분이다. 뻐근한 감동의 울림도 거기서 나온다. 작게 줄인 영상을 휴대전화 화면으로 보는 것으로는 압도적인 감동을 제대로 느낄 수 없다. 불가능하다. 가령, 피카소의 ‘게르니카’를 감상할 때, 축소된 영상으로도 작품의 내용이나 작가의 발언과 제작의도 등은 대충 알 수 있지만, 원작을 보면 이야기가 완전히 달라진다.

과거 해외여행 같은 건 감히 엄두도 내지 못하던 시절, 우리는 화집을 보면서 미술을 공부했다. 그것도 조잡하게 인쇄된. 그러다가 세월이 좋아져서, 화집에서만 보던 작품의 원작을 마주하는 순간의 가슴 벅찬 감동이란…. 그리고 그동안 헛알았다는 자괴감 부끄러움, 낭패감….

언젠가, 우연히 왕년의 명화 ‘벤허’를 유튜브로 봤다. 보다가 짜증이 나서 꺼버렸다. 어린 시절 극장에서 70미리 시네마스코프 대형 스크린으로 봤던 그 감동, 박진감 넘치는 전차 장면의 감동을 소중하게 간직하고 싶었다. 그건 장난감 같은 작은 화면으로는 도저히 느낄 수 없는 것이다.

이제 사람들은 미술관이나 음악회에 잘 안 간다. 번거롭게 찾아갈 필요를 안 느낀다. 온 세상이 내 손바닥 안에 다 있으니까…. 라고 생각한다. 점점 작게 축소되는 세상으로 만족하는 것이다. 얼마나 더 작아지려는 걸까?

그래도 여행은 부지런히 다니고, 유명 관광지마다 인증사진을 찍는 사람들로 넘쳐난다. ‘뉴 노마드 시대’라는 말이 생길 정도다. 자연이나 역사 유물은 당연히 찾아가서 직접 봐야 하는 대상이라고 여기지만, 예술작품은 실물을 안 봐도 충분하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것 참 이상하다.

점점 작아지는 예술감상 방식은 편리할지는 몰라도, 예술의 본질을 외면하는 일이다. 제대로 느낄 수 없다. 같은 돌이지만 바위와 자갈은 다르다. 자꾸만 작아지다 보면, 인간의 크기와 마음마저 쪼그라드는 것이 아닌지 걱정스럽다.

첨단 과학기술은 인간을 변화시킨다. 옛날 영화 ‘ET’의 주인공 모습은 매우 상징적이다. 눈은 크고 이마가 툭 튀어나오고 손가락은 가늘고 길다란 모습…. 요즘처럼 손가락만 까딱거리면 만사가 해결되는 생활이 이어지면, 인간들이 그런 모양으로 변할지도 모른다. AI시대가 본격화되면 한층 더 심해질 것이다.

세상이 아무리 변해도 변하지 말아야 할 가치가 있는 법이다. 장엄함, 웅장미, 숭고함, 깊이와 넓이 같은 예술의 아름다움도 그런 소중한 가치들이다.

큰마음, 깊은 울림, 향기로운 깨달음마저 쪼그라들지 않기를 기원한다.

장소현 / 미술평론가·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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