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인공지능(AI) 기술이 급격히 발전했지만 에너지 문제는 여전합니다. 이번 연구성과가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저전력 AI반도체 기술 개발로 이어질 것으로 기대합니다.”
과학기술정보통신부가 주최하고 한국연구재단과 서울경제신문이 공동 주관하는 ‘이달의 과학기술인상’ 8월 수상자로 선정된 정명화 서강대 물리학과 교수는 6일 세계 최초로 ‘양자역학적 스핀 펌핑’ 현상을 발견한 공로를 토대로 차세대 반도체 ‘스핀트로닉스’ 연구도 주도하겠다는 포부를 밝혔다. 그가 이끌고 한국과학기술원(KAIST)이 참여한 공동 연구팀은 해당 연구성과를 올해 1월 국제 학술지 ‘네이처’에 발표하고 현재 반도체 분야 응용 등을 위한 후속 연구를 준비하고 있다.
반도체 업계가 주목하는 스핀트로닉스의 핵심 원리는 ‘스핀(spin)’이다. 스핀은 이름 그대로 전자의 회전을 의미한다. 엄밀히는 전자는 너무 작아 회전하는지 직접 측정할 수 없다. 다만 전자는 회전한다고 여겨야만 설명할 수 있는 성질들을 가진다. 자석처럼 N극과 S극을 갖는 성질인 자성(磁性)이 대표적이다. 지구가 자전하면서 N극과 S극이 생기는 것처럼 전자도 자성을 가지는데 스핀이라는 것이 그 원인이라는 얘기다.
스핀이 반도체 기술로 응용될 수 있는 연결고리는 ‘스핀 전류’다. 공이 회전하려면 회전 에너지가 필요하듯 전자도 스핀을 가지려면 ‘스핀 에너지’가 필요하다. 전자가 가진 스핀 에너지가 주변으로 전달되면서 전기가 흐르게 되는데 이 흐름을 스핀 전류라고 한다. 이는 전압을 걸어 전자가 직접 전선 안에서 이동하도록 하는 기존 ‘전하 전류’와는 다른 종류의 전류다.
스핀 전류는 기존 전하 전류를 통해 구동되는 반도체의 전력과 발열 문제를 개선할 것으로 기대받는다. 전하 전류는 전자가 직접 전선을 이동하는 과정에서 원자핵이나 불순물과 충돌해 에너지를 잃고 열을 발생시키는 한계가 있다. 정 교수는 “반면 스핀 전류는 전자가 직접 이동하는 게 아니라 스핀 에너지를 전달하는 방식이라 열이 거의 안 생긴다”며 “자석만 있으면 파워(전력)가 나오는 격이라서 전력 효율에서 유리한 방식”이라고 설명했다. 전하 전류가 아닌 스핀 전류를 통해 반도체를 구동하는 기술이 스핀트로닉스다.
스핀트로닉스의 난제는 스핀 전류를 원하는대로 만들어내기 어렵다는 점이다. 스핀은 매우 작은 입자인 전자에게서 나타나는 성질, 즉 양자역학적 성질이라 기존 전자공학으로 제어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전자를 제어하려면 빛이나 자기장 같은 외부 영향을 가해야 하는데 동시에 전자는 이 같은 외부 영향에 취약해서 스핀의 크기나 방향 같은 성질이 의도치 않게 왜곡되는 딜레마가 있다.
현재 그나마 스핀 전류를 만드는 ‘스핀 펌핑’이라는 방법이 있지만 만들 수 있는 전류 크기가 작다는 한계가 있다. 기존 스핀 펌핑은 한 전자의 스핀 에너지가 주변으로 이동해 다른 전자도 스핀이 생기는 원리를 응용하는데 에너지 전달 효율이 낮다. 이 같은 스핀 펌핑 효율을 크게 높인 게 정 교수 연구팀의 성과다. 정 교수는 “기존과 다른 양자역학적 스핀 펌핑 현상이라는 게 존재한다는 것을 실험적으로 입증했다”며 “이 현상을 응용하면 기존보다 스핀 전류 크기를 10배 이상 늘릴 수 있다”고 말했다.
연구팀은 철과 귀금속 로듐을 합친 ‘철·로듐’이라는 소재를 활용했다. 이 소재는 저온에서는 자성이 없는 반자성 상태였다가 온도를 올려 고온이 되면 강한 자성을 갖는 강자성 상태로 바뀌는 특징이 있다. 이는 공이 시계와 반시계 두 가지 방향으로 회전할 수 있듯 전자 스핀도 두 가지 방향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저온에서는 전자 스핀이 두 가지 방향이 골고루 분포하고 서로 상쇄돼 전체적으로 자성이 사라지지만 고온이 되면서 한 가지 방향으로 점점 정렬돼 강한 자성을 띠는 것이다. 연구팀은 이 같은 변화의 중간 지점인 상온에서 스핀 크기가 급격하게 커지고 이 결과로 강한 스핀 전류가 생성되는 새로운 현상을 발견했다. 이것이 기존 스핀 펌핑과 구별되는 양자역학적 스핀 펌핑이다.
정 교수는 “게다가 양자역학적 현상은 보통 매우 추운 환경에서만 관측되는데 우리는 상온에서 구현해냈다”며 “상온에서도 효율 좋은 스핀 전류를 만들 수 있다는 것을 보인 셈”이라고 강조했다. 실제로 스핀은 외부 영향을 최소화할 수 있는 영하 273℃ 근처의 극저온과 진공 환경에서만 그나마 안정적으로 유지되고 제어될 수 있다. 스핀을 포함한 양자역학적 현상을 응용한 양자컴퓨터가 극저온 냉각장치를 동원하고도 오류 문제를 제대로 해결하지 못하고 있는 이유다. 스핀 전류를 늘리는 일 역시 스핀을 제어해야 하는 만큼 극저온 조건이 필수라고 여겨졌지만 상온에서 해법을 찾은 것이다. 향후 반도체 응용 시 극저온 관련 비용을 줄일 수도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정 교수는 2019년에도 ‘네이처 머티리얼스’에 ‘층간 자기적 상호작용’에 대한 논문을 발표하는 등 전력 소모를 크게 줄일 수 있는 스핀트로닉스 같은 자성 반도체 분야를 집중 연구해왔다. 그는 “자성 반도체가 실질적으로 사용 가능할 정도의 전력 효율을 달성할 수 있도록 후속연구를 지속하겠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