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한잔
※[세계한잔]은 우리 삶과 맞닿은 세계 곳곳의 뉴스를 에스프레소 한잔처럼, 진하게 우려내 한잔에 담는 중앙일보 국제팀의 온라인 연재물입니다.
"간호사로 일하면서 채혈하던 중에 환자가 내 얼굴에 침을 뱉고 꼬집었다." 일본 슈에이샤(集英社) 온라인 게시판에 한 일본인 간호사가 올린 글이다. 작성자는 "피할 수도, 움직일 수도 없었다. 손톱으로 파고든 흉터가 아직 남아 있다"고 전했다. 또 다른 간호사는 환자가 휘두른 링거 폴대를 간신히 피했지만, 병원 측이 이렇다 할 조처를 하지 않았다고 분개했다. 환자가 간호사를 해칠 뻔했는데, 오히려 "환자 가족에게 사과하라"는 말을 듣는 간호사도 많다고 홍콩 사우스차이나모닝포스트(SCMP)가 전했다.

이처럼 일본 간호계에는 간호사가 환자들에게 억울하게 피해를 본 사례들이 많았다. 그런데 최근 일본 배우 히로스에 료코가 간호사를 때려 체포된 것을 계기로 억눌렸던 분노가 터지면서 이 문제가 공론화했다고 SCMP가 보도했다. 히로스에는 지난달 7일 교통사고를 당해 이송된 시즈오카 현의 한 병원에서 진료를 기다리던 중, 간호사를 발로 걷어차고 팔을 할퀴는 등 폭력을 행사해 경찰에 체포됐다.

일본에서 간호사가 환자·가족들에게 언어 및 신체적 폭행, 성희롱 등을 당한 사례가 다수 있었던 것으로 조사됐다. 퍼솔 리서치 앤 컨설팅의 지난해 조사에 따르면 일본 의료·복지 근로자의 43.1%가 환자와 그 가족으로부터 괴롭힘을 당한 적이 있다고 답했다. 이들 중 65.2%는 언어폭력을 경험했다. 23.3%는 발이나 주먹으로 맞는 등 신체적 폭행을 당했다. 다른 업종 근로자의 경우, 신체적 폭력을 경험했다고 답한 비율은 2.2%에 그쳤다.
20여년간 일본과 미국에서 간호사로 일했던 쓰카모토 요코 홋카이도 보건과학대학교 교수는 SCMP에 "정신과 환자가 내 목을 움켜쥐고 조른 적이 있다"면서 "동료들이 환자를 끌어낸 후에야 겨우 상황이 끝났다"고 회고했다.
쓰카모토는 환자들이 채혈 등 일상적인 시술을 하는 의료진에게 폭언하는 모습을 수없이 목격했다면서 "일반적인 병원에서 이틀에 한 번씩 이런 일이 벌어지는 듯하다"고 전했다. 그는 "그간 일본 의료계가 일상적인 간호사 학대에 너무 오랫동안 눈감아왔다"면서 "시급한 변화가 필요하다"고 호소했다.

젊은 여성 간호사들이 성희롱을 당하기 쉬운 현실도 문제로 지적됐다. 그는 "간호사 엉덩이를 만진 걸 실수로 보이게 하려는 이들도 있다"고 털어놨다. 그는 "저는 선 넘는 행동에 매우 엄격하게 대응했지만, 젊고 경험이 부족한 간호사들이 모두 저처럼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고 덧붙였다.
문제는 간호사 등 의료진이 환자에게 대응할 방법이 마땅치 않다는 점이다. SCMP에 따르면 환자의 공격에서 자신을 방어했다는 이유로 정직 처분을 받은 간호사도 있었다고 한다. 익명을 요구한 한 간호사는 "열악한 환경이다 보니 간호 인력이 항상 부족하다"면서 "일본 간호사 중에는 정신과 치료를 받아가며 일하는 경우도 있다"고 털어놨다.

이런 가운데 간호사 75만명을 회원으로 둔 일본간호협회는 최근 후생노동성에 "병원 내 괴롭힘과 폭력으로부터 간호사들을 더 강력히 보호해달라고 요청한다"는 탄원서를 제출했다. 협회는 "환자와 다른 의료 이용자와의 불가피한 접촉으로 인해 간호사는 괴롭힘에 노출되는 일이 많다"면서 "안전한 근무 환경을 마련하는 게 절실하다"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