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일전쟁 후 급증한 청 유학생, 일 신조어 삽시간에 수입

2025-05-15

번역과 동아시아 질서의 재편

‘공산당간부 지도 사회주의 시장경제.’ 중국 신문의 기사 제목이다. 상해외국어대학 천성바오(陳生保) 교수에 의하면 여기에 사용된 단어, 즉 ‘공산당’ ‘간부’ ‘지도’ ‘사회’ ‘주의’ ‘시장’ ‘경제’ 모두가 19세기 후반 영어에서 일본어로 번역된 한자어라고 한다. 호사가들은 ‘중화인민공화국’이라는 국호에서 ‘중화’를 제외한 나머지 ‘인민’ ‘공화’는 일찍이 일본에서 ‘피플’ ‘리퍼블릭’의 번역어로 정착된 어휘라고 지적하기도 한다.

서양 개념어 번역 중·일 경쟁에서

경제·사회·문학 등 일 신조어 승리

중국일본에서 일본중국으로

동북아 지식 이동 경로 지각변동

지리적 고립, 지식 수입으로 극복

중화의 변두리 위치 오히려 도움

번역은 국가 차원의 문명화 사업

한국·중국·일본의 동아시아 3국 중에서 번역에 가장 열심이었던 나라는 일본이었다. 일본에 유학한 바 있는 중국의 사상가 량치차오(梁啓超)는 1899년 다음과 같은 말로 일본의 압축근대화 성공의 배경을 짚었다.

“일본은 유신 이후 30년 동안 세계에서 지식을 구해 유용한 책들을 번역한 것이 1000권이 넘는다. 이것들은 모두 백성들을 계몽하고 강국의 토대를 이루는 데 급선무인 것들이었다.”

일본에서 번역은 국가 차원에서 추진한 문명화 사업이었다. 메이지유신 전후 일본인들의 식자율은 상당히 높았다. 따라서 번역은 새로운 지식을 공유하고 확산시킬 수 있는 가장 효율적인 수단이었다. 본디 일본은 에도시대부터 한자 왼편에 기호를 붙여 일본어 어순대로 읽게 하는 독특한 한문 훈독 방식을 채용했는데, 이는 보다 많은 사람으로 하여금 한문 서적에 가까이하게 하는 일종의 학식 공유확산 시스템이었다.

서양의 생소한 개념을 자국어로 옮기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동아시아 한자 문명권의 경우 한자 두 음절의 조합에 의한 신조어는 서양에서 건너온 추상적인 개념을 담아내기에 적합했고, 곧바로 언론매체·교육현장에서 활용되었다. 아울러 18세기 이후 동아시아 3국에서 만들어진 신조어는 약간의 시차를 두고 각각의 언어 속에 이식되었다. 18~19세기에는 중국에서 만들어진 한자어가 한국과 일본에 건너갔고, 19세기 후반부터 20세기 전반까지는 일본에서 새로 만들어진 어휘가 한국·중국에 전파되었다. 다시 말해서 화이질서 속에서 긴 세월에 걸쳐 고착되어온 지식과 정보의 이동 경로에 지각변동이 일어난 것이다.

신조어 간의 중·일 경쟁에서도 십중팔구는 일본의 신조어가 살아남았다. 예를 들면, 일본에서 건너온 ‘경제’라는 한자어가 못마땅했던 량치차오·엔푸(?復)는 ‘economics(경제학)’를 각각 ‘資生學(자생학)’ ‘生計學(생계학)’으로 번역했다. 경제가 ‘세상을 다스리고, 백성의 어려움을 구한다’는 뜻의 ‘경세제민’을 줄인 말인 만큼, 본래 정치영역에 속하는 것을 ‘경제’로 표현하는 것은 부당하다는 것이다. 맞는 말이다. ‘economy’의 희랍어 어원 속의 집을 관리한다는 ‘가정(家政)’의 뜻을 살려 ‘생계학’으로 옮긴 엔푸는 영국유학까지 한 엘리트다운 견식을 보여준다. 그러나 신조어 간의 경쟁에서 이긴 것은 ‘경제’였다. 불합리한 번역어임에도 일본발 신조어가 득세하는 추세 속에서 ‘경제’가 더 근사하게 보였던 것이다. 청일전쟁 패배 후 대거 일본으로 유학을 떠났던 청나라 유학생들은 귀국 후 앞다퉈 일본 서적을 중국어로 번역했고, 일본식 신조어는 단시간에 중국인들의 언어생활에 스며들었다.

중국은 불경 번역 이외에 관심 적어

스스로를 세상의 중심이라고 여겼던 중국인들은 불경 한역 외에는 이렇다 할 번역을 하지 않았다. 소중화 의식에 갇혀 있었던 조선도 오로지 한자 문헌을 통한 지식과 정보 습득으로 자족했다. 섬나라라는 지리적 조건 때문에 문물교류에 상대적으로 불리했던 일본은 밖으로부터 들어온 서적·문헌 등의 문자정보를 통해 세상을 파악하고 터득했다. 19세기 후반까지도 나가사키를 통해 방대한 양의 한문 서적이 수입되었다. 이 중에는 마테오 리치 등 예수회 선교사들이 번역한 『기하원본(幾何原本)』과 같은 과학서적도 섞여 있었다. 일본 최초의 과학서적 번역서 『해체신서』(1774)가 탄생할 기반이 마련되어 있었던 것이다.

서양 유래의 개념을 자국화함에 있어 일본이 돋보였던 배경에는 중화 문명권의 변방에 위치한다는 지리·문화적 조건도 이점으로 작용했다. 오래전부터 중국에서는 한적(漢籍)에 출전을 두지 않는 어휘를 사용하는 것을 두찬(杜撰)이라고 했다. 엉터리라는 뜻이다. 서양 근대를 받아들이자는 양무운동에 나섰던 중국 지식인 중에서도 전적(典籍)에 없는 생소한 조어에 거부감을 드러내는 이가 있었다. 그나마 예수회 선교사 등이 서양 문헌 번역과정에서 새로운 조어를 만든 전례가 있었기에 엔푸 등에 의한 중국발 신조어(新造語)가 만들어질 토대가 갖춰져 있었다. 적어도 20세기 중반까지 동아시아 3국 중에서 신조어 창안에 공헌한 바 없는 한국의 경우도 그 원인을 전통적인 소중화의식 속에서 ‘두찬’을 멀리하고 정통을 고수하려는 보수적 자세에서 찾을 수도 있을지도 모른다.

동아시아 3국의 사대부 계층에게 한학은 기초교양이었다. 상당수가 한문을 읽고 쓸 수 있었다. 그리고 극히 소수였으나 그들 중에서 영어까지 학습한 엘리트 계층이 번역을 담당했다. 비슷한 조건과 환경 속에서 ‘인권’ ‘평등’ ‘자유’와 같은 새로운 한자어를 만들거나 공유하면서 근대라는 새로운 시대를 맞이했다.

번역주의의 빛과 그늘

그러나 번역주의는 결코 만능은 아니었다. 번역어는 태생적으로 결손을 내포하고 불완전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컴퓨터는 중국에서 처음에는 ‘계산기’였지만 현재는 ‘전뇌(電腦)’로 대체되었다. 그러나 ‘전뇌’는 요즈음 주목의 대상인 AI에 보다 더 적합한 번역어가 아닐까. 영어 ‘Literature’의 번역어인 ‘문학’ 역시 허술하고 수상쩍은 단어이다. 학문이 아닌 예술의 한 분야임에도 뜬금없이 배울 ‘학’이 들어간 역어를 채택한 이는 ‘철학’ ‘미학’과 같은 근대 학문용어를 가장 많이 만든 니시 아마네(西周)이다. 역자 개인의 성향에 의한 어긋남이고, 언중의 불합리한 선택의 결과이다.

‘대통령’은 영어 ‘President’의 번역어이다. 대만에서는 ‘총통’이다. ‘대통령’이라는 말은 공화정의 권력분립 원칙에 맞지 않는 시대착오적 명칭이라는 지적이 나온다. 일본에서 대통령이라는 단어가 탄생한 것은 페리 제독이 미합중국 13대 필모어 대통령의 친서를 가지고 일본에 도착했던 때이다. 친서를 일본어로 번역할 때 ‘프레지던트’를 어떻게 옮겨야 하는지가 큰 문제가 되었다. ‘국왕’ ‘국주’ 등이 거론되었지만 미국의 정치체제를 고려하여 ‘통령(統領)’으로 의견이 모아졌다. 그러나 친서를 수령하는 최고 권력자 쇼군의 공식 외교 호칭은 ‘대군(大君, 영어로는 Tycoon)’이었기에 의전의 균형을 취하기 위해 ‘대통령’으로 결정되었다. 대통령이라는 명칭에 어긋남이나 부족함이 있다면 언중들이 그 의미를 보정하고 채우면 될 일이다. 오히려 대통령의 ‘제왕적 권력’을 문제시하면서 한편으로는 군주의 정치적 권한을 의미하는 ‘대권’이라는 용어를 무신경하게 남발하는 세태가 더 문제일 수 있다.

세계 제2의 경제 대국으로 올라선 1970년대 이후 일본에서 만들어지는 한자 번역어는 급감했다. 한자 조어가 사라지고 그 자리를 외래어를 표기하는 가타카나가 차지했다. 중국은 여전히 번역어를 양산하는 중이다. 각국이 번역어를 공유하는 관행도 사라졌다. 한국어의 ‘성희롱’은 중국어로는 ‘성소요(性騷擾)’, 일본어로는 ‘세쿠하라(Sexual Harass ment)’이다. 각국의 일반적인 성인지 감수성의 양태와 결부해서 각각의 번역어를 살펴보는 것도 흥미로울 듯하다.

19세기 후반에서 20세기 초에 이르기까지 동아시아 3국에서 번역에 종사한 사람들이 하나같이 맞닥트린 현실은 자국어의 어휘가 턱없이 빈곤하다는 점이었다. 일상생활 속의 자연어에 가까운 자국어로 서양의 근대적 개념을 표현하는 일은 지난했다. 옆 나라에서 건너온 말이라고 해서 기피하거나 배척하는 것은 사치에 가까웠다. 그렇게 서로 경쟁하고 공유하면서 자국어의 곳간을 채워왔다.

아시아에서 노벨문학상 수상자를 배출한 나라는 동아시아 3국과 인도이다. 인도의 타고르의 경우, 벵골어로 썼던 시를 타고르 스스로가 영어로 번역해서 출판했다. 따라서 순수하게 자국어로 쓴 작품으로 노벨문학상을 받은 것은 한·중·일 세 나라의 작가들뿐인 셈이다. 번역이 없었다면 상상도 못 했을 결과이다. “언어의 한계가 세계의 한계이다.” 영국 철학자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이 한 말이다.

윤상인 전 서울대 아시아언어문명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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