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세기 십자군 전쟁 당시, 예루살렘 원정에 나선 봉건 기사들은 장기 부재중 재산 침탈과 전사 가능성이라는 현실적 문제에 직면했다. 이들은 사망 시 유산을 가족에게 어떻게 안전하게 남길지 고민했다.
이들은 지역에서 신뢰받는 인물에게 재산을 맡기고, 가족에게 유산이 전달되도록 했다. 중세 교회 또한 기부받은 토지를 제3자에게 관리하게 하고 수익만을 취하는 방식으로 신탁(trust)을 활용했다. 현대 신탁 제도의 기원이다.

천 년이 흐른 지금, 초고령사회에 접어든 대한민국에서도 비슷한 고민이 있다. 통계청에 따르면 65세 이상 인구는 2025년 20.6%에서 2050년 40%를 넘을 전망이다. 신체적·인지적 기능이 약화되는 상황에서, 사후가 아니라 생전에 재산 운용과 이전을 계획하는 일이 중요해졌다. 이에 대한 대안이 ‘유언대용신탁’이다.
많은 이들이 유언장을 남기는 것으로 충분할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현실은 다르다. 유언장은 사망 후에만 법적 효력이 발생하며, 형식 요건 미비나 인지 저하로 무효가 되어 가족 간 소송으로 이어지는 경우도 많다. 예를 들어, 치매를 앓는 부모가 자녀들에게 상속을 남기고 싶지만 판단 능력이 흐려진 경우 유언장은 작성이 불가능하거나 무효가 될 수 있다. 유언대용신탁을 통해 판단 능력이 남아있는 시점에 계약을 체결하면, 재산이 안전하게 관리될 뿐만 아니라 가족 간 분쟁을 미연에 방지할 수 있다. 실제 시장의 반응도 뚜렷하다. 2020년 말 8791억원에 불과하던 유언대용신탁 수탁 규모는 2025년 1분기에 3조6000억원을 넘어섰다.
‘보험금청구권신탁’도 주목받고 있는 대안이다. 2023년 11월 자본시장법 시행령이 개정되면서 보험금청구권신탁이 새로 허용되었다. 사망보험금 수령 권리를 신탁하여 미성년 자녀 또는 고령 배우자처럼 자산 운용에 어려움을 겪는 가족을 장기적이고 안정적으로 보호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최근 창업자들은 ‘가업승계신탁’에 관심이 높다. 우리나라 경제성장을 이끌어온 중소기업 창업 1세대의 23.8%가 60대라는 조사결과가 있다. 자녀에게 회사를 넘기고 싶지만, 경영 능력이 부족하거나 지분을 어떻게 분할할지 고민이 많다. 이럴 때 가업승계신탁을 통해 지분을 분할하되, 경영권은 특정 자녀에게만 위임하는 등 상속과 경영을 분리한 설계가 가능하다.
결국 신탁은 단순한 금융상품이 아니다. 복잡한 가족관계, 다양한 이해관계 속에서 ‘내가 없는 이후’에도 내 뜻을 지키기 위한 합리적인 선택지다. 중세 유럽 전장에 출전하는 기사들의 걱정을 덜어준 ‘신뢰의 계약’이 오늘날에는 노후·상속·가업승계라는 현대인의 고민에 대한 해법이 되고 있다.
양원택 한국투자증권 투자상품본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