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왕 믿고 무소불위 권력 행사, 살길 찾아 나라 파는 짓까지

2025-05-22

아첨해서 총애받은 신하, 폐행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고 했다. 하지만 사람이 어디 좋은 이름만 남기겠나. 명예로운 이름을 역사에 남기고 존경받는 사람도 있지만, 오명(汚名)을 남기고 길이길이 비난받는 사람도 적지 않다. 고려시대에도 그랬다. 고려 500년의 인명사전이라고 할 수 있는 『고려사』 열전에는 1000여 명의 전기가 실려 있는데, 그 가운데는 오명으로 남은 경우도 있다. 왕조 시대 나쁜 사람의 전기, 악인(惡人) 열전은 대체로 간신전(姦臣傳)과 반역전(叛逆傳)으로 구성된다. 간신전은 간사함으로 임금을 그르치고 나라에 피해를 준 신하들의 전기, 반역전은 임금을 거역하거나 나라를 배신한 신하들의 전기이다. 그런데 『고려사』에는 특이하게 폐행전(嬖幸傳)이 있다. ‘폐행’이란 임금에게 아첨해서 총애를 받은 신하를 가리킨다.

원 간섭으로 왕권 불안해지자 급증

고려사에 별도로 ‘폐행전’ 만들 정도

폐행에 줄 대려는 발길 끊이지 않자

인사원칙 무너지고 감찰도 무력화

왕 바뀌면 폐행도 숙청, 혼란 더해

애꿎은 백성들 “이게 나라냐” 아우성

왕의 기호 따라 아첨법 달라

폐행전의 첫머리는 이렇게 시작한다.

“옛날부터 소인배는 임금이 좋아하는 것을 엿보아서 영합하고 부추겼다. 때론 아첨으로, 때론 성색(聲色·노래와 여색)으로, 때론 사냥하는 매와 개로, 때론 가혹하게 착취한 재물을 바쳐서, 때론 토목공사를 일으켜서, 때론 특이한 재주나 술수로 임금이 좋아하는 바를 맞춰주고 총애를 구했다. 고려는 나라가 오래되었으므로 아첨해서 총애를 받은 신하가 많았으니 옛 기록에 의거하여 폐행전을 짓는다.”

임금마다 좋아하는 것이 달라서 누구는 여색을 좋아하고, 누구는 사냥을 좋아하고, 누구는 값비싼 재물을 좋아하고, 누구는 화려한 궁궐에 살기를 좋아했으니, 그때그때 임금의 기호를 살피며 아첨하는 신하가 있었다는 말이다. 권력자에게 아첨하는 사람이야 어느 시대엔들 없겠나 싶지만 고려 후기에 그런 사람이 유독 많았다. 조선 건국 후 『고려사』를 편찬할 때 굳이 폐행전을 따로 둔 것도 폐행 때문에 고려가 망했다는 생각에서였다.

고려의 첫 번째 폐행은 목종 때의 유행간(庾行簡)이었다. 그는 외모가 곱고 아름다웠다고 하는데, 목종의 남색(男色) 상대였다. 여성이라면 임금이 아무리 총애해도 조정에는 나오지 못하지만 유행간은 관직에 오를 수 있었다. 총애에 기대 벼락출세를 했고 항상 왕 옆에 있으면서 왕명을 미리 열어보았다. 그러니 관리들이 그의 눈치를 살피지 않을 수 없었고 권력에 도취한 그는 마치 자기가 왕이라도 된 듯 관리들을 턱짓으로 부리는 교만함을 보이기까지 했다. 그의 존재도 하나의 원인이 되어 강조의 정변이 일어나고 목종이 폐위되자 곧바로 죽임을 당했다. 두 번째는 의종 때 점술가 영의(榮儀)였다. 그는 앞으로 일어날 재난을 예견하는 것으로 임금을 미혹시켰다. 의종이 무슨 일인가로 걱정하거나 두려워하면 액막이를 해서 안심시키고 총애를 받았다. 총애가 커질수록 권력도 커졌고 관리들은 다투어 그에게 뇌물을 바쳤다. 하지만 무신정변이 일어나자 곧바로 죽임을 당하고 목이 저잣거리에 매달렸다.

고려 전기까지만 해도 띄엄띄엄 보이던 폐행이 몽골과 전쟁이 끝나고 원의 간섭이 시작되자 갑자기 많아졌다. 사람이 달라진 것이 아니라 정치 풍토가 바뀌었기 때문이다. 원의 간섭 아래서 국왕의 지위는 늘 불안했고 무조건 충성하는 신하를 필요로 했다. 그게 아니라도 직전의 무신집권기 100년 동안 억눌려 지냈던 고려 왕실의 아픈 기억 때문에 충성스러운 측근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있던 터였다. 국왕이 필요로 하니 눈치 빠른 사람들이 몰려들어 아첨으로 충성 경쟁을 벌였다. 본래 국왕의 최측근 자리는 환관의 몫이었지만 고려에서는 환관의 정치 참여를 워낙 심하게 제약했으므로 발호하는 환관은 거의 없었다. 대신 궁궐에서 허드렛일을 하는 내료(內僚)들이 그 자리를 차지했다. 이들은 엄인(?人·고자)이 아니었으므로 일반 관직으로 나아가 고관에 오를 수 있다는 점에서 환관과 달랐고, 그 폐해도 더 컸다. 내료는 7품까지만 승진할 수 있었지만 이 원칙도 깨졌다.

반역자·천민 등 미천한 출신 많아

국왕의 기호를 맞추는 사람도 많았다. 충렬왕이 사냥을 즐기자 매와 개를 잘 훈련하는 사람들이 왕 주변에 포진했다. 또 누구는 병 고치는 푸닥거리를 잘해서, 누구는 바둑을 잘 두어서, 누구는 국왕의 생각을 꿰뚫고 몽골어로 통역을 잘해서, 누구는 장사 수완으로 왕의 곳간을 채워주고 총애를 받았다. 폐행이 되는 길은 제각각이었지만 대부분 관리가 되는 데 하자가 있는 사람들이었다. 사냥개를 잘 길러 충렬왕의 폐행이 된 윤수는 전쟁 중 몽골에 항복했던 반역의 전과가 있고, 이정은 개 도살을 생업으로 하던 천민이었다. 충숙왕의 폐행 중 전영보는 사찰 노비 출신으로 금박 세공을 하던 사람이고, 강윤충과 배전은 천민, 손기는 상인, 왕삼석·양재·최노성은 외국인이었다. 하지만 이들은 자신의 자격과 능력에 비추어 턱없이 높은 관직에 올랐고 국왕의 총애를 믿고 권세를 부렸다.

폐행의 출현은 관료 사회의 질서를 무너뜨렸다. 근무 기간과 실적을 기준으로 하는 인사 원칙은 무너지고 국왕의 총애를 얼마나 받는지, 혹은 국왕의 총애를 받는 사람과 얼마나 가까운지가 승진의 조건이 되었다. 보통의 관리가 애써 올라간 자리 위로 천민 출신 폐행이 낙하산을 타고 덜컥 내려오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그러니 누가 열심히 일하겠는가. 권력자에게 아첨하는 것이 관료 사회의 풍조가 되고 인사철이면 좋은 관직을 얻으려 권력자의 집을 분주하게 찾아다니는 분경(奔競)이 줄을 이었다. 무너진 것은 인사의 공정성만이 아니었다. 감찰을 통해 불법·비리를 저지른 관리를 솎아내는 기능도 마비되었다. 고려는 중앙에 감찰사(監察司)를 두고 지방에는 안찰사(按察使)를 파견해서 관리들을 감찰하는 제도를 갖추어 놓았지만 폐행들의 위세 앞에 제대로 작동되지 못했다. 폐행의 불법 행위를 적발하고 처벌하려던 감찰관이 거꾸로 모함을 받아 처벌되기 일쑤였다. 충렬왕 때 폐행 윤수를 탄핵했던 감찰사의 관리 전원이 파직되는 사건이 있었는데 『고려사』는 그 기록 끝에 “마침내 언로가 막혔다”는 한 마디를 덧붙여놓았다. 이 뒤로 관리들이 국왕에게 바른말을 못 하게 되었다는 뜻이다.

아첨으로 잔뼈 굵은 처세 달인들

하지만 폐행의 정치 생명에는 한계가 있었다. 국왕의 총애에만 의지해서 권력을 누렸던 만큼 국왕의 마음이 바뀌면 곧 쫓겨났고 그렇지 않더라도 국왕이 죽거나 퇴위하면 함께 물러나야 했다. 새 국왕에게는 총애하는 사람이 따로 있었다. 그래서 국왕이 바뀔 때마다 전왕의 폐행들을 숙청하는 피바람이 일었고 그것이 고려의 정치를 몹시 혼란하게 하는 원인이 되었다. 측근정치가 가지고 있는 구조적인 불안 요소였다. 하지만 아첨으로 잔뼈가 굵은 사람들인지라 권력이 교체되어도 살아남는 처세술을 보이기도 했다. 새 국왕의 폐행으로 변신하는 경우도 있었고 살길을 찾아 더 놀라운 행동을 보인 사람도 있었다. 충렬왕의 폐행 가운데 오잠이란 사람이 있었다. 특이하게도 과거에 급제한 문신이지만 충렬왕에게 아첨해서 총애를 받았다. 충선왕이 충렬왕과 싸워 승리하자 충선왕의 폐행이 되어 살아남는 데 성공했다. 그 뒤 충선왕이 원에서 실각하고 토번(티베트)으로 유배되자 의지할 데가 없어진 그는 원에 가서 고려를 없애고 원의 영토를 편입시키자는 책동을 벌였다. 자기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나라를 파는 행동을 마다하지 않았던 것이다.

고려 후기에 폐행이 득세하면서 능력 있는 사람이 인정받지 못하고 강직한 사람은 배척받으며 대다수 관리가 입을 닫고 눈치만 보는 세상이 되었다. 그 피해는 고스란히 백성들에게 전가되었다. 폐행이 백성들의 토지를 마구 빼앗고 양민을 억눌러 노비로 삼는 등 거침없이 불법을 저질러도 막을 길이 없었다. 그 시절 ‘국지불국(國之不國)’, 즉 “이게 나라냐!”는 아우성이 터져 나온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그렇게 된 일차적인 책임은 국왕에게 있었다. 원 간섭기의 국왕들은 하나같이 폐행을 키우고 가까이하면서 왕위를 보존하고 왕권을 강화하는 데 골몰했다. 이렇게 사적인 관계에 있는 폐행들의 권력 행사를 방조했으니 국가 권력이 삿된 것이 되고 국왕의 권위는 실추될 수밖에 없었다. 최고 권력자가 공사 분간을 못 하고 권력 주변에 있던 사람들이 자기 살기 위해 무슨 짓이라도 할 수 있는 나라, 그런 나라는 미래가 없다.

이익주 역사학자·서울시립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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