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미국의 공중 보건을 책임지는 질병통제예방센터(CDC) 국장이 취임 한 달 만에 해고된 후 기관 고위간부들의 사임이 잇따르고 있다. 백신 음모론자인 로버트 케네디 주니어 보건복지부 장관과 백신 정책으로 마찰을 빚은 뒤 급작스럽게 해임되는 등 미국의 공중 보건 리더십이 흔들리고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워싱턴포스트는 27일(현지시간) 백악관이 수전 모나레즈 CDC 국장을 해임했다고 보도했다.
모나레즈 전 국장은 케네디 주니어 장관과 CDC의 백신 접종 지침을 두고 갈등했던 것으로 전해졌다. 한 관계자는 케네디 주니어 장관 등 백신 반대론자들이 백신 정책의 변경에 동참할 것인지를 물으며 충돌이 벌어졌다고 말했다. 모나레즈 전 국장이 백신 자문위원들과 논의 없이는 정책 변경에 동의하지 않겠다고 밝히자 케네디 주니어 장관이 “행정부의 정책을 지지하지 않는다”며 사임을 촉구한 것으로 전해졌다.
대표적인 ‘백신 음모론자’로 꼽히는 케네디 주니어 장관은 코로나19 백신 접종을 제한하는 등 백신 정책에서 급격한 변화를 추진하고 있다. 그는 지난 6월 CDC 산하 백신 자문위원 17명을 한꺼번에 해고했다. 지난 5일에는 메신저 리보핵산(mRNA) 백신에 대한 5억달러(약 7000억원) 규모의 백신 개발 프로젝트 투자를 취소하겠다고 밝혔다.
이날 복지부는 코로나19 백신 접종 대상자를 제한할 것이라고 발표했다. 이 조치에 따라 백신 접종 대상자는 65세 이상이거나 기저 질환이 있는 등 고위험군으로 분류되는 사람들로 좁혀진다.
모나레즈 전 국장의 변호사인 마크 자이드 등은 이날 “케네디 주니어 장관과 보건복지부는 정치적 이득을 위해 공중 보건을 무기화하고 미국인 수백만명의 생명을 위험에 빠뜨리고 있다”며 “모나레즈는 정치적 의제에 봉사하기보다는 국민을 보호하는 것을 선택해 표적이 됐다”고 말했다.
이날 모나레즈 전 국장뿐만 아니라 CDC에서는 최고 의료 책임자, 감염병센터 소장 등 주요 임원 4명이 사임했다. 데메트레 다스칼라키스 국립 면역 및 호흡기 질환 센터 소장은 이날 사임하면서 “공중 보건이 무기화되는 상황이 지속하고 있어 더 이상 이 역할을 맡을 수 없다”고 동료들에게 이메일을 보냈다.
케네디 주니어 장관이 CDC의 직원들을 해고하고 예산을 삭감하면서 기관의 영향력이 급격하게 축소되고 있다고 우려가 나온다. 전임 조 바이든 행정부에서 CDC 국장을 역임한 맨디 코헨은 “(사임한 임원들은) 수십년 동안 여러 행정부를 그치며 봉사해온 뛰어난 지도자들”이라며 “CDC의 약화로 인해 미국의 안전이 떨어지고 취약성이 커졌다”고 했다. 각 도시의 공중 보건 관계자들을 대표하는 비영리 단체 빅시티헬스연합의 사무총장 크리시 줄리아노는 “한 기관을 이끄는 고위 공무원들이 같은 날 이렇게 많이 사임하는 것은 CDC가 어떻게 국민의 건강을 보호할 것인지 큰 의문을 제기한다”며 “이는 국가 건강에 있어 큰 손실”이라고 말했다.
오랜 기간 연방정부의 과학자로 일해 온 모나레즈 전 국장은 미 상원의 인준을 받아 지난달 31일 임명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