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력·열정·포기하지 않는 끈기… “치열했지만 행복했던 삶” [나의 삶 나의 길]

2025-09-09

한국 여자농구의 전설 박신자 여사

국민 스타서 월드 스타로 빛나다

중 1 때 공이 림 들어가는 느낌 좋아 시작

국제대회서 눈부신 활약으로 승리 견인

1967년 체코 대회선 준우승·MVP 차지

은퇴 후에도 계속된 농구인의 삶

美 유학길·주한미군과 결혼·행정가…

韓 농구 실업팀 최초로 여자감독 맡아

亞 선수 처음 美·FIBA 명예의 전당에

자신 이름 딴 ‘박신자컵’ 10주년

2015년 유망주 기량 점검 대회로 창설

日·스페인·헝가리 프로팀 참여로 격상

“젊은 후배들 농구 본다는 게 너무 뿌듯”

전쟁의 기운이 여전하던 1953년, 숙명여중 입학을 앞둔 한 소녀는 친구들과 앞으로 다닐 학교 구경을 갔다. 교정에 농구공 하나가 있었고 소녀는 운명에 이끌린 듯 공을 집어 농구 골대로 던졌다. 신기하게 공이 그물을 스치듯 ‘쏙∼’ 하고 빨려들어 갔다.

“그 순간을 아직도 잊지 못해요. 림에 들어가는 그 소리, 손끝에 남은 감각, 제 안에서 뭔가가 불타오르던 느낌…. 그때 이미 제 길이 정해진 거죠.”

이 소녀는 1967년 체코 세계여자농구선수권대회에서 한국을 준우승으로 이끌며 우승팀 선수를 제치고 대회 최우수선수(MVP)로 뽑히게 된다. 이후 한국 실업팀 최초의 여자 감독을 지내고 미국 여자농구 명예의 전당과 국제농구연맹(FIBA) 명예의 전당에 헌액된다. 주인공은 바로 한국 여자농구의 살아 있는 전설 박신자(84) 여사다.

코트를 떠난 지 반세기가 넘었지만 그의 농구는 여전히 계속되고 있다. 그의 이름을 따 열리는 ‘박신자컵’이라는 이름으로 손녀뻘 후배들에게 전해지고 있기 때문이다. 미국 로드아일랜드에서 사는 박 여사가 ‘박신자컵’ 10주년을 맞아 한국을 찾았다. ‘2025 박신자컵’ 결승전이 열린 지난 7일 부산 사직체육관에서 만난 그는 “치열했지만 행복했던 삶이었다”며 미소지었다.

◆국민적 스타로 성장해 가다

짜릿했던 첫 슛의 기억이 뇌리 깊숙이 남아 있던 중학 신입생 박신자는 농구부를 노크했다. 숙명여중 언니들이 피란지였던 부산에서 경기, 이화여중 등 라이벌 학교들과 벌인 농구대회에서 우승기를 들고 강당에서 개선식을 하는 장면에 전율한 뒤다.

농구를 시작하고 나서 키도 쑥쑥 자랐다. “입학할 때는 책상 세 번째 줄 정도에 앉는 키였죠. 그런데 어느새 제일 키가 큰 학생이 됐지요.” 박 여사의 신장은 176㎝로 지금 여자농구 선수치고 큰 키가 아니지만 당시 한국 성인 남성의 평균신장이 165㎝가 안 되던 시절이란 걸 고려하면 눈에 띄는 장신이었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박신자의 포지션은 센터가 됐다. “아주 마른데 키만 크다고 별명이 ‘젓가락’이었어요.”

‘주머니 속 송곳’은 숨길 수 없다. 그는 곧바로 두각을 나타냈다. 숙명여고가 국가대표로 발탁돼 홍콩에서 열린 국제대회에서 참가하게 됐는데 숙명여중생 3명도 데려가기로 했고 중3이던 박신자가 포함됐다. “그때 공교롭게 손가락을 다쳐 대표팀에서 빠질 위기였죠. 한 사람 해외에서 먹이고 재우는 게 엄청난 부담이 될 때라 당연히 못 갈 줄 알았죠. 그런데 당시 감독님이 박신자를 데려가야 한다고 해서 갈 수 있었어요.”

손가락 부상에도 박신자는 언니들과 호흡을 맞춰 제 몫을 다했고 7전 전승을 이끌었다. 아직 앳된 얼굴의 소녀였지만, 이미 국가대표의 책임감을 짊어지고 있었던 모양이다. “어떻게든 이겨야 한다는 생각이 컸지요”라며 웃는다. “당시 경무대에 초대돼 이승만 대통령도 직접 만날 수 있었어요.”

박신자가 국민적 스타가 된 계기는 1961년 2월, 일본농구협회 초청으로 일본 원정을 떠난 경기였다. 일본 최고의 실업팀과의 맞대결은 조국의 명예가 걸린 대결이었다. 선수들은 이를 악물고 뛰었고 모든 경기를 이겼다. 김포공항에 돌아오자 꽃다발 세례와 인파의 환영이 쏟아졌다. 시민들은 “박신자! 박신자!”를 연호했다. “원수를 갚아줘 고맙다는 팬레터도 받았었죠.”(웃음)

◆국민스타에서 월드스타로…체코 세계선수권

숙명여고를 졸업하고 대학을 갈지 농구를 할지 고민하던 박신자는 결국 실업팀 상업은행(현 우리은행)을 택했다. 1964년 페루에서 열린 세계여자농구선수권대회에 출전할 기회도 얻었다. 예선에서 박신자는 혼자 67점을 몰아넣었고 이를 지켜본 각국 기자들은 그를 ‘야신파르(무적)’라 불렀다. “제 이름을 페루식으로 발음한 별명이라는데, 뜻이 무적이라니 더 특별했죠.”

이후 박신자가 진정한 ‘월드 스타’로 거듭난 무대가 있었으니 1967년 4월 체코에서 열린 세계선수권대회였다. 엄혹한 냉전시대와 남북한 대치상황에서 공산권 국가에서 열리는 국제대회에 처음 나가다 보니 선수단 전체가 긴장했다. 특히 북한측 요원들이 우리 선수단과 접촉하려는 시도가 빈번했다. “피는 물보다 진하지 않느냐며 자꾸 말을 걸고 만나자고 했죠. 당시 서독에서 동독을 통해 북한으로 간 사례가 나오는 등 국가적으로 시끄러웠던 상황이라 선수단 전체가 행동이 조심스러웠지요.”

선수들은 외출은커녕 화장실도 3명 이상이 함께 다녀와야 할 만큼 개인행동이 철저히 금지돼 감금 아닌 감금 생활을 했다. “잠도 큰 강당 같은 곳에서 간이침대를 쫙 설치해서 다 같이 잤을 정도였어요. 그렇게 조심했는데도 당시 단장님이 가지고 간 선수단 소개책자를 체코 당국이 정치 선전물이라고 시비를 걸어 추방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엄혹한 환경도 박신자를 필두로 한 한국 선수단의 의지와 기량까지 통제할 수는 없었다. 11개국이 참가한 이 대회에서 한국은 평균신장이 20㎝ 이상 큰 서방과 동유럽 국가들을 하나씩 격파해 갔다. 특히 준결승에서 개최국 체코를 꺾고 결승에 진출하며 전 세계를 놀라게 했다. “장신 선수들을 상대하는 건 쉽지 않았지만, 저는 스피드와 타이밍으로 맞섰어요. 이길 수 있다는 믿음 하나였죠.”

결승 상대는 신장 210㎝의 장신 센터가 버티고 있는 소련이었다. “내 머리가 그 선수 턱에 닿을 정도였죠. 느리다는 약점이 있었지만 막기는 버거웠어요.” 소련을 이기기는 불가능했고 한국은 준우승을 차지했다. 그렇지만 온 국민이 환호했다. 무엇보다 박신자는 준우승 국가 선수로는 이례적으로 대회 MVP에 뽑히는 영광을 누리게 됐다. 그만큼 그의 활약이 강렬하고 인상적이었다는 의미다.

금의환향이었다. 당시 김포공항부터 동대문 서울운동장까지 카퍼레이드가 펼쳐졌고 수많은 인파가 몰려 박신자와 한국 여자농구 대표 선수들을 환영했다. 청와대에 초청돼 박정희 대통령과 육영수 여사를 만났고 국민훈장도 받았다. 그는 단순한 선수가 아닌 국가적 자부심의 상징이 됐다.

박신자는 그해 10월 일본 도쿄에서 열린 유니버시아드대회에도 출전해 금메달을 목에 걸며 화려했던 선수생활에 마침표를 찍었다. 두둑한 포상이라도 받았는지 묻자 그는 “지금같이 생각하면 안 된다”며 고개를 저었다. “당시 가장 귀한 음식이었던 불고기 같은 거 먹고 싶다면 사주는 정도지, 포상금 같은 건 없던 시대였죠. 순수한 아마추어였다고나 할까요.”

◆은퇴했지만 계속된 농구인의 삶

1967년 11월 2일, 서울 장충체육관에서 열린 박신자 은퇴식은 장관이었다. 8000여명의 팬과 은사, 동료들이 그의 마지막 경기를 지켜봤다. “관중석에 앉아 울고 있는 팬들을 보고 저도 눈물이 멈추질 않았습니다.” 이튿날 박정희 대통령이 청와대로 그를 불러 “스포츠로 국위를 높였다”는 찬사와 함께 5·16민족상을 수여했다.

박신자는 제2의 인생을 가꾸기로 했다. 상업은행 시절에도 틈틈이 공부해 숙명여대 영문과를 다니던 그는 이화여대 대학원에서 체육학을 공부하다 미국 유학길에 올랐다. 농구를 창시한 네이 스미스의 학교인 미국 스프링필드 칼리지를 콕 집었고 열심히 공부해 1969년 체육학 석사 학위를 받았다. 귀국한 뒤 1970년 주한미군이었던 남편과 결혼해 딸과 아들을 낳고 단란한 가정을 꾸렸다.

그렇게 잊히는 듯했지만 농구계가 가만 놔두질 않았다. “1982년에 농구인 출신으로 신용보증기금 전무였던 김영기(전 KBL 총재)씨한테 연락이 왔어요. 새로 팀을 만드는 데 감독을 맡아줄 수 있느냐는 거였죠. 여자팀인데 여자 감독도 있어야 하는 거 아니냐고 하더라고요.”

선수로서는 자신 있었지만 지도자로서는 부족하다고 느꼈던 박신자는 자신이 원하는 이들과 함께 팀을 이끌 수 있도록 해주는 조건으로 감독직을 수락했다. 한국 농구 실업팀 최초의 여자 감독이 탄생한 것이다. 성적은 좋지 않았다. “내내 졌지요. 하하. 그래도 마지막 경기에서 이겼을 때 상대팀 감독님이 엄청 화를 내시던 기억은 나네요.”

짧은 감독 생활을 마친 박신자는 행정가로서 농구 발전을 위해 발 벗고 나섰다. 서울올림픽조직위원회 농구 담당관을 맡아 1986년 아시안게임과 1988년 올림픽의 농구 경기 운영과 국제 교류를 총괄하며 한국 농구의 외연을 넓혔다. 1992년까지 여자농구협회 이사로 한국 농구를 위해 열심히 일했다.

이후 미국에 정착해 조용한 삶을 살고 있었지만 그의 존재감을 농구의 땅 미국에서도 잊지 않고 있었다. 1999년, 그는 아시아 선수 최초로 미국 여자농구 명예의 전당에 이름을 올렸다. “그때 수락 연설에서 ‘중학교 1학년 때 공이 림에 들어가던 그 느낌이 좋아 농구를 시작했다’고 말했더니 관객들이 웃더군요. 하지만 그게 제 진심이에요.” 박신자는 2020년에는 FIBA 명예의 전당에도 헌액됐다. 이 역시 아시아인 최초다. 명실공히 전 세계가 인정하는 여자농구 전설로 공인된 순간이었다.

◆조카 박정은과 박신자컵 10년

박신자는 올해 초 기쁜 소식을 들었다. 친조카인 여자프로농구 BNK 박정은 감독이 여자 감독 최초로 챔피언결정전 우승을 차지했다는 것이다. “가족이라서가 아니라, 농구인으로서 존경합니다. 선수 분석도 뛰어나고 지도력도 탁월해요. 저보다 더 훌륭한 지도자예요.”

여기에 또 하나 기쁜 일이 있었다. 2015년 창설된 ‘박신자컵’이 올해 10주년을 맞았다. 10년 전 자신의 이름을 딴 대회가 만들어졌을 때 한국을 찾았다가 10주년을 맞아 다시 고국을 방문했다. 처음 이 대회가 만들어졌을 때는 여자프로농구에 갓 입문한 유망주들의 기량을 점검하는 성격의 대회였지만 지금은 일본, 스페인, 헝가리 프로팀이 참여하는 국제대회로 어엿하게 성장했다. 자신의 이름을 딴 대회가 이렇게 커진 것에 대해 “젊은 후배들이 농구 하는 걸 본다는 게 너무 뿌듯해요. 나는 운이 좋은 사람입니다. 그래서 더 감사해요”라는 말도 잊지 않았다. 그는 실력과 노력으로 세계 최고의 선수가 됐지만 “좋은 지도자, 좋은 동료, 좋은 기회…. 모두 운이었죠. 저는 그저 농구가 좋아서 따라갔을 뿐입니다”라며 자신을 낮췄다.

하지만 박신자를 아는 사람들은 안다. 그것은 운이 아니라 노력과 열정, 포기하지 않는 끈기였다는 것을. 그가 최근 국제무대에서 부진한 한국 여자농구 선수들에게 “좀 더 노력하라”고 쓴소리를 할 수 있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래도 박신자는 “유소년 선수들을 육성하고자 하는 관계자들의 노력과 어린 선수들을 보면서 울컥하기도 했다. 앞으로 지금 어린 선수들의 이름이 걸린 대회가 나왔으면 좋겠다”며 한국 여자농구의 희망찬 미래를 기대했다.

한국 여자농구 전설 박신자는…

●1941년 서울생 ●숙명여고-숙명여대 영문학사 ●이화여대 대학원 미국 스프링필드대 체육학 석사 ●1967년 체코 세계선수권대회 MVP ●1967년 국민훈장 석류장 ●1982년 신용보증기금 창단 감독 ●1986∼1988년 서울올림픽조직위원회 농구담당관 ●1999년 미국여자농구 명예의 전당 헌액 ●2020년 국제농구연맹(FIBA) 명예의 전당 헌액 ●2015년 대한민국 스포츠 영웅 선정

송용준 선임기자 eidy015@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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