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발효음식 1번지’로 통하는 전북 순창
전국구로 명성 떨치는 ‘고추장’ 활용
한식 넘어 술·디저트 등 다채로운 시도
방문객들에 ‘색다른 미식 여행’ 선사
전통 장문화 체험하는 ‘발효테마파크’
작년 ‘떡볶이페스타’ 2만명 몰려 성황
한식의 영혼이라 할 수 있는 발효음식, 김치와 장(간장, 된장, 고추장). 이 중 자연스럽게 지역 이름과 등치되는 음식은 고추장이다. 전라북도 순창이 지도상 어디쯤 있는지 모르는 이들도 순창 하면 고추장으로 유명한 건 안다. 한국을 오가는 국제선에서도 어김없이 만날 수 있는 것이 이 고추장 아니던가.
맛있는 고추장을 만드는 데 최적지인 순창은 발효음식 1번지로 통한다. 지난해 한국 장 담그기 문화가 유네스코 인류무형유산에 등재된 것을 계기로 순창은 더욱 존재감을 드러낼 발판을 얻었다. 밥상의 기본이 되는 장부터 술과 디저트에 이르기까지 다양하고 이색적인 발효음식을 선보이고 있는 것도 흥미롭다.

왜 순창 고추장일까?
음식엔 손맛과 정성만 필요한 게 아니다. 제대로 된 풍미를 내기 위해선 기후조건도 갖춰져야 한다. 습한 기후는 발효균을 활성화하므로 장을 담글 땐 습도가 중요하다. 섬진강을 낀 분지 지형인 순창은 연평균 안개가 끼는 날이 77일로 다른 지역보다 10~20% 많고 습해 천혜의 입지를 갖춘 것으로 평가된다.
깊은 단맛이 있는 순창 고추장은 다른 지역과 달리 늦여름에 메주를 띄워 겨울에 담근다. 겨울철에 서서히 숙성되는 과정이 신맛을 줄이고 단맛을 높인다는 것이다. 또 간장용 메주로 고추장을 담그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순창에선 고추장용 메주를 따로 만든다. 멥쌀과 대두를 4 대 6으로 섞어 만드는 고추장용 메주는 단맛에 구수한 감칠맛도 더해준다.
순창 고추장의 오랜 명성에는 조선 태조 이성계가 반했다는 이야기도 한몫했다. 건국하기 전 이성계가 순창을 지나다 한 농가에서 맛본 고추장을 잊지 못하고 왕이 된 뒤 이를 진상하도록 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고추는 임진왜란 이후 조선에 전해졌기 때문에 이는 ‘전설’일 가능성이 크다. 이성계가 맛봤던 것은 고추장이 아닌 산초나 후추를 넣어 빚은 짙은 색의 장으로 추정된다. 조선 숙종·경종 때 어의를 지낸 이시필이 18세기에 편찬한 <소문사설>에 왕실에서 먹는 순창 고추장을 언급한 것을 보면 순창은 장맛으로 수백년간 명성을 이어오고 있는 셈이다.

순창 전통 고추장 민속마을에는 대한민국 식품명인 64호인 강순옥 명인을 비롯해 30여명의 장인이 대를 이어 고추장을 만들고 있다. 강 명인이 운영하는 순창장본가를 비롯해 이곳에 있는 여러 매장에선 고추장과 된장, 간장, 전통 장아찌류를 맛보고 살 수 있다.

발효의 메카 ‘발효테마파크’
2021년 문을 연 발효테마파크는 장문화를 전시, 체험, 놀이로 풀어낸 복합문화공간이다. 충실한 전시, 흥미로운 체험거리가 채워져 있어 자녀를 동반한 가족도 둘러볼 만하다. 음식의 역사와 발효의 원리에 대해 알려주는 푸드 사이언스관, 발효과학을 놀이문화로 즐길 수 있는 효모사피엔스관, 장류를 저장한 발효소스 토굴 등이 특히 눈에 띈다. 올여름에는 호남지역 최대 규모의 물놀이장도 테마파크 내에 문을 연다.

지난해에는 순창 고추장을 사용한 ‘떡볶이 페스타’가 테마파크 내에서 열렸는데 2만5000명이나 몰려 대성황을 이뤘다. 축제를 주관한 순창발효관광재단에 따르면 순창군이 생긴 이래 한꺼번에 이렇게 많은 인파가 몰린 것은 처음이었다. 올해도 11월에 떡볶이 페스타가 열릴 예정이다. 10월에는 유네스코 인류문화유산 등재를 기념하는 ‘순창장류축제’도 개최된다.
발효테마파크에서 놓치지 말고 맛봐야 할 것은 고추장, 청국장, 된장을 활용한 아이스크림이다. 상상과는 달리 꽤 세련된 맛이 난다. 고추장 아이스크림은 살짝 칼칼한 뒷맛이 특히 매력적이다.
발효 고장, 뭘 맛볼까?
순창에도 ‘삼합’이 있다. 고추장으로 양념한 섬진강 민물장어, 청국장 소스로 맛을 낸 돼지고기 수육, 간장으로 감칠맛을 극대화한 김치. 다른 지역의 삼합은 세 가지를 한꺼번에 싸먹는 방식이지만 순창에선 각각 맛볼 것을 권유받는다. 장류의 맛을 최대한 끌어내 그와 어울리는 음식과 함께 먹는다는 취지에서 개발됐기 때문이다. 유명 한식 파인다이닝 두레유 유현수 셰프가 참여했다. 순창 삼합은 대궁, 녹원, 뜨란채 등 현지 식당에서 맛볼 수 있다. MZ 여행객들에게 특히 인기가 많은 음식은 이원일 셰프가 개발한 레시피로 만든 고추장불고기다. 해뜬집, 함양식당, 한오백년 추어탕 등에서 내놓는다. 창림동 두부마을은 순창에서도 이름난 순두부 노포다. 산경에서는 푸짐한 한정식을 합리적인 가격에 맛볼 수 있다.

고급 전통주 지란지교는 최근 몇년 사이 부상한 순창의 전국구 명물이다. 30년간 공무원 생활을 하다 퇴직해 부모님 집터로 귀농한 임숙주 대표가 “무화과 농사를 지으면서 우리 부부가 함께 마실 요량으로 틈틈이 만들어 본 술”이 일을 냈단다. 우리술품평회 등 유수한 전통주 대회에서 수상하며 청와대 만찬주로도 올랐고 현재는 온지음 같은 한식 파인다이닝에서도 만날 수 있다. 최고의 히트작은 무화과를 넣어 빚은 무화과 막걸리다. 이곳에서는 전통주 빚기 체험교실도 열린다.
순창 발효미생물산업진흥원이 개발한 발효커피 ‘리던’은 구수하고 부드러운 맛을 내며 카페인 함량이 낮다. 로컬푸드직판장 등에서 맛볼 수 있다. 순창의 대표적 관광지인 강천산 입구에 자리 잡은 여러 카페에서는 순창 고추장을 넣어 알싸한 풍미를 더한 고추장 초콜릿을 선보이며 등산객들의 구미를 당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