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터리] 평범함에 도전하는 사람들

2025-08-25

“대학 진학 준비로 수면이 부족하던 고등학교 2학년 때 처음 뇌전증을 진단받았죠.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았어요. 지금은 약물로 잘 조절돼 2년 넘게 발작 없이 지내고 있습니다. 평범하게 생활하는 뇌전증 환자가 많다는 걸 사람들이 알아줬으면 좋겠어요.”

서울의 한 대학에서 경영학을 전공하는 김 모(25) 씨는 매일 오전 8시에 도서관으로 향한다. 토익과 자격증 시험 준비로 바쁜 그의 일상은 여느 취업준비생과 다를 바 없다. 하지만 가방 속에는 항뇌전증약이 항상 들어 있다. 10년째 뇌전증과 함께 살아온 그는 “남들처럼 평범하게 살고 싶다”는 소망으로 도전을 이어가고 있다.

경기도에서 세탁소를 운영하는 정 모(54) 씨는 “발작이 올지 모른다는 불안감을 안고 매일 아침 가게 문을 여는 데 용기가 필요하다”고 털어놓았다. 정 씨는 대학 졸업 후 뇌전증 이력 때문에 수차례 취업 문턱에서 좌절했다. 경제적 어려움에 우울증까지 찾아왔지만 수많은 난관을 뚫고 자영업자로 자리 잡았다.

국내 뇌전증 환자는 약 40만 명에 달한다. 그러나 우리 주변에서 쉽게 드러나지 않는다. 직장 동료, 학교 친구, 심지어 가까운 친척에게도 알리지 못한 채 홀로 견디는 이들이 대부분이다. 약물 치료로 일상생활이 충분히 가능하지만, 여전히 ‘평범함’은 그들에게 가장 어려운 도전이자 간절한 소망이다. 우리는 흔히 ‘장애 극복’하면 헬렌 켈러처럼 위대한 업적을 남긴 인물들을 떠올린다. 하지만 정작 이들이 바라는 것은 거창한 성공이나 특별한 인정이 아니다. 아침에 일어나 출근하고 동료들과 커피 한 잔을 나누며, 퇴근 후에는 가족과 저녁을 먹는 것. 이런 평범한 일상 자체가 뇌전증 환자들에게는 매일 이뤄내야 할 위대한 도전이다.

무엇보다 사회적 편견의 벽이 크다. 2012년 ‘간질’에서 ‘뇌전증’으로 병명이 바뀌었지만 여전히 많은 이들이 이 질환을 ‘위험하고 전염되는 병’으로 오해한다. 한 조사에 따르면 뇌전증 환자의 70% 이상이 직장이나 학교에서 차별을 경험했다고 답했다. 응급처치는커녕 발작 환자를 방치하거나 동영상을 찍어 소셜미디어(SNS)에 올리는 일도 있었다. 뇌전증 대발작 시 응급처치는 의외로 간단하다. 환자의 고개를 옆으로 돌려 기도를 확보하고 의식이 돌아올 때까지 지켜보며 발작이 5분 이상 지속되면 119를 부르면 된다. 이 정도만 알아도 생명을 구할 수 있다.

이들이 평범한 사회 구성원으로 살아가려면 무엇이 필요할까. 그것은 ‘다름’을 인정하는 관용이다. 누구나 조금씩은 다른 어려움을 안고 살아간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성숙함이 필요하다.

한국의 1인당 국민소득은 3만 5000달러를 넘어섰다. K팝과 K드라마는 세계를 매료시킨다. 경제적, 문화적 위상이 한껏 높아진 데 비해 우리 사회의 포용성은 여전히 모자란 것 같다. 이러한 개방성과 사회 관용은 뇌전증 환자처럼 사회적 약자만을 위한 것이 아니다. 세대·젠더·지역 갈등과 같이 사회 곳곳에 퍼진 긴장과 대립을 완화하는 열쇠가 될 수 있다. 서로의 다름을 인정하고 공존을 모색할 때 갈등 조정에 낭비되는 사회적 비용을 줄이고 모두가 더 건강한 삶을 누릴 수 있을 것이다. 최근 문을 연 제2기 뇌전증지원센터는 의료 지원을 넘어 환자들이 ‘평범한 일상’을 누릴 수 있도록 사회적 문화를 만드는 것이 목표다. 평범함에 도전하는 이들의 용기에 우리 사회가 응답할 차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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