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트럼프 정부와의 협상이 일본과 같은 15%의 상호관세율로 확정되면서 일단 한 고비는 넘긴 국면이다. 그러나 일본· 대만 같은 전통적 대미 외교 강국의 전통, 역량과 자산, 그리고 그 집요함에 비해 불안불안한 느낌을 감출 수 없는 게 한국의 총체적 대미 외교다. 여권 내 분란으로 무산된 대미 특사단 논란이 대표적이다. 트럼프 정권 고위층과의 교분·채널이 전혀 없는 대선 논공행상의 결과였다. 백악관 오벌오피스에서 만나 줄 우리 외교의 인적 자산이 거의 없다는 우울한 방증일 뿐이었다.
특사단 구성조차 힘든 외교 역량
일본·대만은 오랜 미국 공들이기
정파, 기업 간 내부분열 해소하고
한국계, 싱크탱크와 유대 강화도
우리의 대미 수출 경쟁국인 대만과 일본은 강력한 대미 우호의 전통을 이어 왔다. 워싱턴 트윈 오크스의 대만대표부는 과거 중화민국의 주미대사 관저였다. 일대에선 가장 웅장한 저택이다. 미·중 수교로 국교를 끊었어도 미국은 이 관저를 대만이 유지토록 해주었다. 수교한 중국에 명동의 금싸라기 중화민국대사관을 넘겨준 우리와는 달랐다. 트윈 오크스에 초대돼 밥을 얻어먹지 않은 미국 의원들이 거의 없다는 게 정설이다. 대만 국경일에 트윈 오크스에서 미 하원 외교위원장은 “대만 보호가 미국 안보와 경제 이익의 핵심” “대만을 사랑한다”고 해 박수를 받았다. 중국의 거센 반발에도 대만을 찾은 낸시 펠로시 하원의장이 “대만을 지키려는 미국의 결의는 철통(iron clad)같다”고 한 확신도 하루아침에 나온 게 아니었다. 대만은 정권과 상관없이 추이텐카이(崔天凱) 대표를 2023년까지 무려 8년간 재임케 해 채널을 구축했다. 이름도 알리기 전 정권 따라 교체된 건 우리의 주미대사였다.
가쓰라태프트 조약 이래 120년간 대미 외교 경험을 쌓은 일본은 워싱턴 도심을 사쿠라로 채웠다. 1921년 도쿄 시장이 선물한 묘목 3000그루가 번져 우호의 상징으로 만개했다. ‘벚꽃 축제’의 150만 명에게 일본 기업들이 협찬하는 하나미(꽃구경), 사케·일식·기모노 축제 등으로 공을 들여 왔다. 대만·일본의 줄기찬 미국 챙기기는 국익에의 ‘절실함’에서 나왔다. 대만은 생존의 구원자가 미국뿐이니 올인이었다. 대만계 교민들을 무기로 미 의회 내에 친대만 의원 모임(타이완 코커스)을 결성했다. 무려 200여 명에 이른다. 패전의 충격과 대미 통상을 통한 초강대국 도약 과정에서 일본 역시 미국과의 우호는 불변의 으뜸 외교였다. 두 나라 모두 공산 중국과 맞서는 자유민주주의 보루라는 자기 존재의 가치를 끊임없이 미국에 주입시켜 왔다.
반면에 우린 한국전 이후 25년간 미국의 경제·군사 원조의 최대 수혜국으로 지내면서 그만 절실함을 잊은 과거가 있다. 박정희 정권의 인권 탄압에 불만이던 카터 정부의 미군 철수 추진에 충격을 받고서야 부랴부랴 나섰지만 박동선의 ‘코리아 게이트’라는 엄청난 후폭풍을 맞아야 했다. ‘종전 선언’에 목을 매던 문재인 정부 시절 배태된 수미 테리 로비 파문 역시 운신을 좁혔다. “수미 테리 사건 이후 미 의회 보좌관들이 한국 측과는 점심도 잘 안 먹으려 한다”는 게 워싱턴의 전언. 북핵 억제의 안보 동맹, 안정적 거대 시장의 관점에서 대미 관계의 막중함, 절실함을 번쩍 깨닫게 한 게 역설적으로 최근 트럼프의 압박이었다.
우리의 고질인 분열이야말로 가장 큰 약점이다. 워싱턴의 고위 외교관 출신 인사는 “우리 대기업들은 워싱턴 정보 공유를 거의 안 한다”며 “미 조선산업 지원도 한화오션과 HD현대 간 경쟁이 과열돼 이를 간파한 미국 측이 양사의 경쟁을 활용하려는 움직임까지 있다”고 전했다. 그는 “정부·기업·민간이 일사불란, 한목소리인 일본·대만과 달리 우린 적잖은 돈을 쓰면서도 따로따로의 비효율뿐”이라며 “한국 의원단이 함께 미 의원을 만나면 여야가 각각 상반된 요구를 하고 나가선 전혀 다른 해석을 해 조롱거리가 된지 오래”라고 한다. 외교의 가장 큰 무기는 나라 통합이다.
소프트 파워를 통한 다원적 접근의 시대지만 미 고위층과의 악수와 사진찍기가 우리 외교의 수준이었다. 일본 수석대표인 아카자와 료세이 경제재생상은 MAGA 모자가 씌워진 굴욕에도 “그럼 다음 주에 또 뵙겠습니다”라며 세 달간 여덟 차례 워싱턴을 찾았다. 묵묵히 미국에 공들여 온 일본 외교의 전통이다. 민간 기업이 출연한 사사카와재단 역시 미 학계, 민간에 돈을 쓰며 스며들었다. CSIS(전략국제문제연구소)같은 싱크탱크, 박물관 등에의 기부와 정부 직원 파견으로 지일파들을 계속 늘려 왔다. 백악관·의회에 영향을 줄 외곽 여론까지 중시하는 치밀함이다.
“트럼프는 트럼프의 말만 듣는다”가 워싱턴의 정설이다. “딱 하나 트럼프가 신경쓰는 게 주요 상대국의 정상”이라는 게 대사관 관계자의 분석이다. 보름 뒤 정상회담에서 이재명 대통령이 트럼프와의 개인적 교분·신뢰를 만드는 건 최우선이다. 영 김 등 한국계 미 의원 5명도 든든한 우군으로 챙겨 달라. CSIS 등 싱크탱크를 찾아 지한(知韓) 네트워크 의지를 보여주라. 무엇보다 대미 외교를 점검·재정비해 워싱턴에 강력한 ‘코리아 베이스캠프’를 구축해야 할 시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