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마트폰 금지와 정치의 실패

2025-08-31

학생들의 스마트 기기 사용을 금지하는 법이 국회를 통과했다. 교사의 지도·통제(교육권) 강화와 학생의 스마트 기기 과의존 예방(학습권)이 입법 취지라고 한다. 우리가 쉽게 상상할 수 있듯 이 법은 학생들의 스마트 기기 사용을 교사들이 ‘통제’하기 힘든 현실을 반영한다. 이는 즉각 학교공동체와 교실의 현실, 인권을 둘러싼 논란을 낳는다.

학교는 특정한 기능을 수행하는 기관이자 다양한 구성원들이 관계를 맺는 하나의 사회이기도 하다. 또한 주체들 간 논의를 통해 의사결정을 하고 바깥의 정치적·사회적 관계를 반영하는 정치적 공간이다. 이곳은 오랫동안 권위주의적 윤리 규범에 따라 운영되었지만 ‘민주화’의 영향은 교실 안으로도 이어져 ‘학생인권’과 같은 대항규범이 출현하기도 했다. 그러나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의 문제의식과 유사하게 기존의 질서를 대체하는 제도(조례나 법)들은 제대로 기능하거나 자리 잡지 못했다. 그런 가운데 학교는 ‘계몽’의 공간이자 진영의 전장이 되었고 교권과 인권은 각 진영의 깃발이 되었다.

‘제도로서 학생인권’마저 진영정치에 의해 왜곡되거나 파괴되기도 했다. 그야말로 학교는 과잉정치화된 공간이 되었다. 교권과 인권 간 허구적 갈등이 반복될 뿐, 학교 공동체 이익에 복무하는 탈정치적 논의, 즉 공동체의 회복과 민주적 확장을 위한 논의 같은 것은 기대할 수 없는 상황에 이르렀다.

학교는 스스로 질서와 규범을 창출하는 데 사실상 실패했고, 학교를 대신한 국회는 지난 3월 수업을 방해하는 학생을 분리하는 법안을 통과시켰다. 이번엔 교실에서 스마트 기기 사용을 금지한다고 결정했다. 자기통치를 포기하는 대신 법률이 그 자리를 대신했고, 그것은 정치의 대표인 국회에 의해 정치의 실패가 역설적으로 증명된 것이다. ‘금지하는 법’이 학교·교실에 늘어날수록 정치는 사라질 것이고 주체들은 사법적 관계로 재편될 것이다. 아니 이미 우린 피고와 원고가 된 학생과 교사들을 마주하고 있다.

‘민주정치의 요체는 갈등의 동원’(샤츠슈나이더)인데, 여기서 갈등은 일방적 지배가 아닌 다양한 입장 간 경쟁을 말한다. 정치는 이를 통해 공동체의 의지를 형성해가는 행위다. 하지만 당파적 이익을 앞세우는 과잉정치화된 사회는 의지의 형성에 거듭 실패하다 정치를 피로한 것으로 치부하고 결국 행정이나 법으로 그것을 대신한다. 이철희는 “정치를 배제한 행정 중심의 국가운영이 곧 박정희 모델의 골간이고, 정치 축소가 신자유주의의 근본 명제 중 하나란 사실도 기억해야 한다”며 반정치를 경계한 바 있다.

지금 우리 정치는 정청래와 장동혁이 표상하듯 끊임없는 실패를 예고하고 있다. 반면에 대통령은 행정가적 기질에 실용을 앞세운다. 정치의 실패를 행정과 실용이 대신할 수 있을까? 스마트폰 금지법으로부터 우리 공동체의 미래를 우려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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